해인사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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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종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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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해인사벽화

신라불교의 대성자로서 추앙되고 있는 원효스님은 속성이 설이시니, 압량군의 북쪽, 율곡 사라수 아래서 출생하시어 29세에 황룡사로 출가하셨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경·율·론에 통달하여 삼장법사가 된 현장스님이 29세에 큰 뜻을 세워 17년 만에 서역(인도)의 고승 대덕들을 찾아 불법과 학문을 연구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온 해가 645년이었다.
나란타사의 계현스님에게 학습한 〈유가론〉 〈인명론〉 〈구사론〉 등으로 불법을 펴 장안과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세상에 널리 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 스님들은 현장스님에게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를 찾아가게 되었다.
신라의 원효 스님도 육로로 고구려 변경을 넘어서 당 유학 길에 나서다가 국경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의상스님과 동행하여 백제 땅을 거쳐 바다로 요동까지 가서 무사히 닿아 길을 계속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문 뒤 원효 스님과 의상스님은 인가가 끊긴 산중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을 피하여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한밤중 원효 스님은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뜨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어떤 함박 같은 것이 보이고 그곳에 물이 고여 있기에 얼른 그 물을 입으로 가져다 해갈했다.
그 물맛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스님은 단숨에 그릇을 비운 뒤 만족한 기분으로 새벽이 지날 때까지 잠을 푹잤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의 갈증을 풀어준 그릇을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것인가, 스님이 그릇이라고 여겼던 것은 인간의 해골이 아닌가? 그리고 그 물은 거기에 고여있던 빗물이 썩었던 것이 아닌가!
스님은 불현듯 자신의 배를 뒤틀고 올라오는 구토에 ‘억, 억’ 하고 오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은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마셨던 물이 썩은 빗물인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 달콤하고 감미롭던 것이 아침에 일어나 해골물인줄 알고 나서는 온갖 추한 생각과 구역질을 일으키지 않는가.
스님은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없는 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모두 마음 뿐이라. 어찌 나를 속였으리요.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랴.
(心生則 種種法生/心滅則 觸 不二/三界 唯心/萬法 唯識/心外 無法/胡用 別求)」
이런 게송으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읊었다.
밤사이 원효 스님 곁에서 누워 자고있던 의상 스님은 일어나 당나라까지 먼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는 스님에게 “원효 스님 왜 길 떠날 생각을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원효 스님은 대답대신 의상 스님에게 “우리가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의상 스님은 얼른 “그야 도를 구하기 위함이지요”라고 대답하자 “그럼 이미 도를 구하였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겠지요”하며 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신라로 돌아와 그곳에서 깨달은 법을 가지고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며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스님의 높은 도덕은 온 신라를 덮고 널리 알려졌다.
하루는 스님께서 장안거리 (경주)를 다니며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바칠 기둥을 찍으련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를 들은 무열왕은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뜻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난다면 그보다 큰 이로움이 없으리라.”하는 생각으로 신하를 보내 과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모시도록 했다.
스님을 문천 다리에서 만나거든 일부러 물에 빠뜨리라고 일렀다. 옷을 젖게된 스님은 그 옷을 말리느라고 할 수 없이 요석궁에서 유숙케 되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공주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신라의 이두를 집대성 한 대학자인 설총이다.

스님은 그로부터 스스로 저자거리에 나와 속복을 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걸식을 마다 않고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무애(無碍)라고 이름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포교하셨다.
스님은 세수 70으로 열반하실 때까지 여러 가지 기행과 설법과 방대한 저술 활동으로 초인적 행을 보이셨다.
중국에 널리 알려진 금강삼매경론 3권은 경주 황룡사에서 대중들에게 직접 강론하신 것이다.
저서 1,000여권 중 현재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240여권, 대승 소승의 삼장을 통털어 찬술한 점에 있어서는 일찌기 없었던 일이며 그 중에 원효 스님의 중심사상이 담긴 「십문화쟁론」은 오래된 법보로서 대승기신론과 더불어 불교인들이 공부해야 할 명저이다.
스님이 입적하신 해는 신문왕 6년 혈사에서 였고 지월록에 스님의 많은 일화가 적혀있고 고려시대 숙종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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