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 대장경
- 대장경의 종류
- 고려대장경
- 대장경의 조성과정
- 보전과 소실위기 극복
- 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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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바의 의하면 부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와 중생들에게 한 설법과 교화 내용은 생전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했다.
80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이 패엽경(貝葉經)이다.
패엽경이란 최초의 불교 결집에서 만들어진 결집경전(結集經典)으로 패다라(貝多羅)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여 만들었다.
패다라는 인도에서 종이 대신 글자를 새기는 데 쓰였던 나뭇잎을 말하는데, 흔히 다라수(多羅樹) 잎이 많이 쓰였으므로 그렇게 불려졌다.
다라수는 종려나무와 비슷하고, 그 잎은 바탕이 곱고 빽빽하고 길다.
글 쓰느데 사용하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자획(刺劃)을 만들고 먹을 넣는다.
그 크기 6~7 센티미터, 길이 60~70 센티미터 정도이며 양쪽에 구멍을 뚫어 몇십 장씩 실로 꿰어 묶어둔다.
패엽경이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제자들은 생전에 부처님께서 설파한 가르침을 흩어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각자 들은 바를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고 하여 서로 논의하고 모아서 결집(結集)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사서의 칠엽굴에서 가섭(迦葉)을 상좌로 500명의 비구가 모여 경(經), 율(律), 2장(藏)의 정리하여 다라수 잎에 새긴 것이다.
이후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모두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臧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三臧)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梵語) 혹은 빨리(Pali)어로 된 뜨리삐따까(Pitaka)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戒律)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처음엔 이 세 가지 종류의 부처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다라수 외에도 나뭇잎, 대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부처님이 태어난 아열대 지방의 기후는 너무 덥고 습하여 오랫동안 보존 할 수 없었으므로 못쓰게 되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여러 종파들은 제각기 다른 대장경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대표적인 것이 지금 산스크리트어 혹은 빨리어로 기록된 뜨리삐따까이다.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글, 즉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차츰 여러 종파의 인도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사성제. 팔정도를 닦아나가는 엄격한 자기 수행 중심의 소승불교에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대중적 대승불교로 통합되고 경, 율, 논 삼장의 내용을 정비하면서 인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아직은 오늘날 남아있는 것과 같은 형식의 대장경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으로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게 되면서 인도어로 된 불경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처음에 산발적이었던 번역사업은 포교활동과 함께 당시 나라를 통치하던 지배계층이 관심을 갖게 되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불경의 번역사업은 통치의 한 수단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으며 최초로 동진(東晋)의 도안(道安, 344~385)이 한나라 이래의 각종 번역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한 이후 당나라 개원 18년인 730년 지승(智昇)이 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라는 번역서 목록 등은 번역불경을 정리한 좋은 예였다.
중국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오던 불경의 번역사업이 체계적으로 정일되기 시작한 연대는 양·진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수·당 시대까지도 손으로 베껴쓰는 필사본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필사본 번역불경은 옮겨 쓰는 과정에 이중으로 번역되거나 잘못 번역하는 등 정확을 기하지 못했고 종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므로 나뭇잎, 대나무, 나무 껍질 등의 사용으로 보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재료를 찾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돌을 재료로 한 석판(石板)대장경, 금속판에 새긴 금속판대장경도 쓰이게 되었다.
중국 운거서 방산석경 1만여 장은 지금 남아있는 가운데 대표적인, 돌로 만든 대장경이다.
그러나 취급과 보존, 또 인쇄하여 널리 알리는데 편리한 점을 고려한다면 나무를 대신할 만한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목판(木板)대장경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 대장경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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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면서 종이 제조 기술의 발달도 함께 이루어져 인쇄가 가능해지자 비교적 쉽게 경을 반포할 수 있게 되었다.
송나라에서 시작된 경판 새기기 사업은 우리 나라의 경우 맨 처음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에서부터 의천의 속장경,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졌고, 거란대장경, 몽골대장경, 티베트대장경, 서하판대장경 등을 제작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 외에도 세계적으로는 20여 종의 대장경이 있지만
교정을 철저히 하여 정확도가 높고 완성도가 높은 면에서도 다른 대장경이 따라 올 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이 팔만대장경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대장경판의 제작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대장경 제작으로 이어졌으나 일본만은 독자적인 대장경을 근세까지도 만들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80여 회에 걸쳐 우리의 팔만대장경을 분양해 달라고 끈질긴 요구를 하여 왔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뒤늦게 우리의 대장경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간행된 대장경을 바탕으로 1881~1885년 사이에 만든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과 1924~1934년의 10여 년에 걸쳐 만든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 만족해야 하였다.
팔만대장경과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주요한 대장경의 종류를 알아보자.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
송나라 태조의 어명으로 태조 4년(972)에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이르는 11년에 걸쳐 완성된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판은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는 물론 중국과 우리 나라를 통틀어 최초로 조성된 목판대장경판으로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 부처님 말씀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후 우리 나라와 거란 등에서 만들어지는 목판대장경판의 효시가 된 경판이다. 북송칙판대장경은 일명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촉판대장경(蜀版大藏經), 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이라고도 하며 앞에 말한 지승의 개원석교록를 근거로 하였다. 총 1,076부 5,048권의 불경을 자그마치 13만 때나 되는 목판에 새겨, 천자문 차례로 이름을 붙인 480개의 함에 차례로 보관하였다.
이 대장경의 제작은 인도를 제외한 한문 문화권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불경 정리 작업이었고 동시에 최초의 불경간행 사업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전파된 불교가 비로소 체계적인 경전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사람들이 불교 중심의 종교생활을 하며 정신적 지주를 삼았으므로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 경판은 송나라의 휘종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금나라 침입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대부분 없어져 버리고 최근에 와서 10여권이 발견된바 있다.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
송나라의 칙판대장경이 만들어지자 중국과 왕래가 빈번했던 고려에서는 성종 10년(991) 송나라 사신으로 가있던 한언공(韓彦恭)이 귀국하면서 북송치판대장경 481함 2500권을 가지고 돌아와 비로소 내용이 알려졌다. 이어서 현종 13년(1022)에는 한조(韓祚)가 역시 송나라로부터 보완된 칙판대장경 500여권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후 고려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 북방오랑캐들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함과 더불어 부처님의 가피력를 얻고자 우선 현화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판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쳐보자는 정말 안타까운 시도를 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온 국민의 정성으로 오로지 이 대장경을 조성하여 나라와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겠다는 거룩한 뜻에서였다. 그런데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자 거란군이 물러가게 됨으로써 더욱 부처님의 가피력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을 새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문경헌은 “초조대장경 조성의 동기는 불력(佛力)을 빌어 거란군을 물리치려는 목적으로 외적 격퇴를 위하여 조성했다는 종래의 견해를 탈피하여, 거란과의 전쟁이 종식되고 요나라와 사대교류를 하기 시작한 친선 평화시대에 조성되었다고 보았다. 그 동기는 현종이 부모를 추선(追善) 하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이를 조성했다. 첫째 부모의 추선과 현종 왕가의 미약한 전통성과 권위의 제고를 위하여, 둘째 대장경을 조성하고 싶은 불교왕국 고려의 문화적 욕구와 민족적 자긍심과 신앙심이었다. ”라고 하여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현종은 수입한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일종의 대장경을 간행하는 관서라고 할 수 있는 반야경보(般若輕寶)를 설치하고 대반야경, 화엄경을 비롯한 불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처음 시작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종 2년(1011)경부터 꾸준히 계속되어 현종 22년(1031)에 일단 끝이 났다. 문종(1046~1083)초기에 다시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이르러 초조대장경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제작기간에 대해서는 현종 때 완료됐다는 설과 선종 때 최종 완성됐다는 등 학자들 간에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는 현종 때 초조대장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천 여권의 경판을 완성했고 문종 때 1천 여권의 경판을 추가로 새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의 대장각판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에 나타나 있는 대로 현종 2년(1011)에 시작하여 선종 4년(1087)까지 76년간에 걸쳐 판각 하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초조대장경을 새기는 작업을 실제로 맡아서 총괄한 사람은 누구 였을까?
현종 때의 대장경 판각사업은 당시 별감이었던 최사성(崔士成)의 책임하에 추진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사성은 목종을 섬기는 동안 관직을 여러 번 옮겼는데 현종 초에 통군사(統軍士)가 되었다가 그 후 현화사의 창건과 초조대장경 조성의 총책임을 맡았다 한다.
이 경판을 우리는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 혹은 초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초조대장경은 570개 함 6천여 권에 이른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盤若波羅蜜多經)을 시작으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열반경(大涅槃經) 등 경.율.논 3장이 모두 집약돼 있다. 송의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이를 수정, 보완해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판을 넣은 함은 다른 대장경들과 마찬가지로 천(天)함에서 시작해 초(楚)함데 이르기까지 천자문으로 순서가 매겨졌다.
이 초조고려대장경은 대체로 송의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복각(復刻)한 것도 포함되어 있은 내용과 체재를 토대로 대부분 새로이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보면 고려인들이 보완과 수정을 가하여 원본보다 더 훌륭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는지 그 편모를 알아 볼 수 있다. 완성된 초조대장경판은 대구의 팔공산 부인사에 고이고이 보관하여 오다가 아깝게도 고종 19년(1232)에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 2차 침입 때 의천(義天)의 고려속장경과 함께 불타버리고 만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은 일본의 남선사(南禪寺)에 1500여권, 국내에는 200여 권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가끔 발견되고 있다. 호암박물관이 100여 권으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성암 고서박물관 등 여러 곳에 분산돼 있다. 그나마 초조대장경의 일부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것만도 험난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천만다행한 일이다.
초조대장경은 우리 나라에서 가정 먼저 만들어졌다 해서 초조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983년 북송 떄 만들어진 칙판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한자번역 대장경으로서 문화사적 의의가 큰 대장경이다.
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
거란은 송나라의 북송칙판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초조대장경보다는 약간 늦게 거란의 흥종(1031~1054)때에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한다. 완성된 정확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거란의 도종(道宗)이 고려 문종 17년(1063)에 거란대장경 전질을 고려에 보내온 것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479함으로 구성된 거란대장경은 개원석교목록과는 함호(函號)배열이 다르고 일부 없어져 버린 불경이 수록되어 있는 등 칙판대장경이나 우리의 초조대장경 및 의천의 속대장경과는 또 다른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귀중한 대장격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대장경은 내용이 우수하여 현재의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관하였던 수기(守其)대사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참조 이용되었다.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
현종과 선종 대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완성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문종 때 조종에서는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게 명하여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이 대장경을 고려속장경, 의천의 속장경 혹은 속장경 등으로 부른다.
초조대장경은 북송칙판대장경을 원본으로 하여 경·율·논 삼장(三藏)을 주로 모아서 기록한 것에 비하여, 이의 주석서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는 장(章)·소(疏)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 고려속장경의 특징이다. 삼장(三藏)은 이미 정리가 이루어지고 판각까지 되었으나 장·소(章·疏)는 아직 정리하여 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츰 흩어져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의천은 판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천은 문종 27년(1073)에서 선종 7년(1090)까지 25여 년간에 걸쳐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의 송나라와 요나라까지 광범위하게 장(章)·소(疏)를 수집하였다. 특히 선종 2년(1085)에는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서 화엄대불사의론(華嚴大佛思議論) 등 3천여 권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실제의 작업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수집한 자료를 하나하나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속장경을 새기기 시작한 시기는 초조대장경이 거의 완성되어가던 때였으며 경 · 율 · 논의 정장과는 다른 일종의 속장(續藏)인 장(章) ·소(疏)를 간행한 것으로써 고려가 또 다른 대장경판을 새겼다는 귀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속장경은 독실한 불자들이었던 고려인들에 의하여 널리 읽혀지고 수많은 간행이 있었을 것이나 이후 이어지는 몽골의 침입을 비롯한 잇단 외환으로 말미암아 전질의 경판은 물론 인쇄본마저 거의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일부 인쇄본과 조선 초에 중수, 간행된 불서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 순천 송광사에, 다른 인쇄본 일부는 일본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에 전하고 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앞의 여러 대장경들이 모두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나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재조고려대장경(再彫高麗大藏經)등으로 불리워지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32호로 지정 받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왜 팔만여 장의 경판을 새겼을까? 우연히 만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가?
불가에서 팔만 혹은 팔만 사천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많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을 일컬을 때 팔만사천 법문(法門)이라 하고 사바세계의 수많은 번뇌도 팔만 사천 번뇌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의 팔만이라는 숫자에는 부처님의 법문을 새겨서 인간의 번뇌를 씻어낸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선 이 대장경판의 내력을 간단히 알아보자.
수 십 년에 걸쳐 완성된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은 고종 19년(1232)몽골군에 의하여 무참히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무력한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항쟁을 위하여 서울마저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게 된다. 이에 고려는 다시 한번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침에 대처하고 민심을 수습코자 대장경을 새길 계획을 세운다. 대장도감을 새로이 설치하고,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년까지 장장16년간에 걸쳐 다시 대장경을 조성했다.
경판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후에 같은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 근처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아직은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팔만대장경판은 상당 부분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그대로 나무에 붙여 복각했다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 중심의 주장도 있으나 항상 우리의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그들의 못된 시각일 따름이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하고 송 · 거란본과도 비교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을 찾아 넣었으며 초조대장경에는 없었던 경서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팔만대장경은 북송의 칙판대장경을 효시로 20여종에 이르는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나왔다고 하나 다른 어느 대장경보다 본문이 충실하여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에서 속장경,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지는 경판의 제작은 현종 2년(1011)에서 고종 38년(1251)에 걸쳐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가적 위기에 시기에 장장 2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이었다. 대장경의 완벽한 제작은 문화국으로서 고려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여 그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랑거리이다.
- 고려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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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을 말한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판은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현종때부터 문종대에 걸쳐 완성한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년)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崔瑀) 등이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완성한 경판의 총 판수가 81,258매에 달하며, 84,000가지 중생의 번뇌에 대치하는 84,000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초조대장경이 전란 속에서 타버리고 그것을 다시 판각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대장경의 원래 뜻은 범어인 트리피타카(TRIPITAKA)가 말해주듯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놓은 론(論), 이 세 가지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경전 일체를 총괄하는 것이기에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경전은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 부처님의 설법을 정리해서 성문화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성립한 경전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소승경장과 대승경장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불교발달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처음으로 성립한 경전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 4백여 년까지 4회에 걸친 결집(6회의 결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을 통해서 이른바 소승불교의 핵심 장경인 소승경장, 소승율장, 소승론장을 확립하게 된다.
이 경전들은, 기원전 4세기에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고 열렬한 불교 신자인 3대 아쇼카왕이 즉위하면서 국세가 비약적으로 팽창함과 더불어 널리 전파되어,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바을 비롯한 인도 전 지역고 그리스 식민지인 박트리아 , 나아가 스리랑카, 미얌마 등 남방 지방으로 퍼져나가 4세기경에는 남방불교의 기본 경전으로 뿌리 내렸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래된 주된 불교경전은 이른바 대승삼장으로서, 이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 약 600여 년 뒤인 기원전 1세기쯤에 일어난 대승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경전들이다.
부유층이나 왕실이 제공한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출가주의를 내세우며 경전을 연구·주석하면서 고답적인 독신주의에 치우쳐 있던 당시 불교계를 반성하고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재가불교도 중심의 이 대승불교운동은,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초월하여 널리 사회를 구제하려는 실천적 신앙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수많은 대승경전들을 출현시킨다.
1세기 후반에 북인도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기반으로 성립한 쿠샨왕조 제3대 카니시카왕 때에 이르러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는다.
그의 적극적인 불교 보호 정책에 힘입어 대승불교운동은 중국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해서 학승들이 차례로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을 한역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반야경』 종류를 필두로,『유마경』,『법화경』 등의 유명 대승경전들이 차례로 나타나 한역되고, 그에 따라 대승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정착시키는『중론송』같은 대승논장들도 등장하여 7세기쯤에 이르러서는 중국 및 한국, 일본에까지 대승삼장이 확고한 위치를 점하면서 한자문화권의 중요 문화요소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 대장경의 조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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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군신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호국의 일념으로 시작한 대장경 조성사업은 워낙 대규모의 국가 사업인지라 따로 진주 지방 남해연한에 분사도감을 설치하여 판각을 나누어 진행하였다.
군사도감 장소로서 진주, 남해가 정해진 까닭은 그곳이 몽골의 병화가 미치기에 쉽지 않은 남해안 지방인데다 당시 무신 권력의 핵심인 최우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고,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한 경판재료를 가까운 거제도에서 마음껏 구하여 바닷가에서 제대로 제작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경 판각에 앞서 그 내용을 교정하고 새로이 편찬하는 책임자로는 당대에 화엄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개태사(開泰寺) 승통 수기(守其)대사가 맡았다.
그는 30여 명의 학승들을 거느리고 팔만대장경 경문을 교정할 때 기존에 인출해놓은 우리의 초조대장경본과 송나라 대자경인 북송관판대장경본, 그 사이에 나온 거란대장경본을 엄밀히 비교 · 대조하여 착오를 상세히 정정하고 빠진 부분을 보완했으며, 그 동안 각 나라에서 모은 독자적인 불전들과 그밖에 『개원석교록』과 『정원석교록』 같은 일급 불전목록을 참고자료로 삼아 완벽한 대장경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수기대사는 법량이 광활하고 법안이 명쾌하여, 대장경을 교정봄에 있어 각종 자료들을 변증하고 옥석을 가리는 것이 헌헌장부 칼 휘두르듯 막힘 없이 자재하여,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기가 마치 자신의 저술을 검열 보듯 했다.
수기대사는 그 교정의 엄밀한 과정을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30권을 따로 만들어 팔만대장경 안에 수록하였는데, 이 『교정별록』은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정본으로 하게 된 경위를 상세한 근거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어서, 그 자료적 가치가 절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에서는 대장경 판각을 위한 경판 재료를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기록에는 없으나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2년 뒤에 본격적인 판각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미루어, 경판 재료는 적어도 그 5년 전인 1234년, 그러니까 강화 천도를 결행한 지 2년 뒤인 고종 21년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판을 만든 재료는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白樺木)로서, 거제목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추정해보면 하나의 완전한 경판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했는지, 그 대규모의 까다로운 공정을 어떻게 하나처럼 완벽히 수행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경판 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원목을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구어 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내서는 그늘에 말린 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판을 만든다.
완성된 밑판은 판각하는 곳으로 옮겨지고, 판 각수들은 여기에다 편찬 교정이 끝난 경의 내용을 구양순(歐陽詢)필체로 경판 수치에 알맞게 정성껏 써놓은 사경원(寫經員)들의 판하본을 붙여 한자한자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다.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하고 마무리 손질을 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네 귀에 동판(銅版)으로 장식하여 한 장의 경판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성들여 세심하게 제작한 까닭에 7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판들 모두가 썪는다든가 좀먹는다든가 뒤틀리는 일 없이 온전히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판은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3.6cm)이며, 약3.5kg쯤 무게가 나간다.
판면은 가로 1척 5촌(약 45.5cm), 넓이 7촌5분(약 22.7cm)으로 위아래에 경계선을 그었고, 한 면에 23행씩 행마다 14자씩 앞 뒤 양면에 444자쯤 새겼다.
새긴 글자의 크기는 사방 5분(약1.5cm)쯤이다.
판의 뒷면 끝에는 새긴 경의 제목, 장수(張數), 천자문 차례에 따른 함이름을 새겼고, 경판 양쪽 끝 각목에도 같은 표시를 새겨 정리하고 찾기 쉽게 해놓고 있다.
이렇게 조판하여 완성한 고려팔만대장경의 수량은 정확히 얼마나 될까?
이에 관하여서는 조사자들에 따라 파이가 적지 않은 실정이고 정설이 없다.
일제시대 총독 테라우치가 일본 천용사(泉湧寺)에 헌정하려고 인경(印經)할 때 조사한 것이 표준으로 여겨져왔는데, 그에 따르면 팔만대장경의 종수는 1,512종에 6,819권, 총81,258매의 경판이 있는 것으로 조사 보고되어 있다.
고려팔만대장경 자체의 대장목록에는 책종과 그에 따른 권수, 장수만 표시되어 있고 총계가 없다.
대장목록에 따라 계산하면 1,524종에 6,569권이 되는데, 목록과 각 경판의 실제 수량에 차이가 다소 있는데다 보유장경까지 넣고 있어서 혼선이 생기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총괄하여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에는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정장 1,497종에 6,558권, 보유정장(부장) 4종에 150권, 총 경판 81,258매로 적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조사 보고로는 경북대학교 서수생 교수의 것이 세밀하데, 그는 팔만대장경 정장 수량을 1,524종에 6,606권, 78,500매의 경판으로 보고, 보유장경판 17종 238권, 2,740매의 경판을 더하여 총 1,541조에 6,844권, 81,240매의 경판에 160,642장의 장수를 가진 것으로 자세히 내역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종수만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대 중반에 인출한 팔만대장경을 정본화하여 고유번호까지 매겨 세계 각 나라에 보낸 동국대학교 팔만대장경 영인본에는 팔만대장경의 고유번호가 1,514까지 매겨져 있다.
말하자면 1,514종의 불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판 팔만대장경 해제는 팔만대장경의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번호를 붙여가며 각 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풀이한 것인데, 여기서는 1,537로 끝을 맺고 있다.
서수생의 1,541종은 보유경판의 『대장일람』, 『대장일람집목록』까지 포함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동국대 영인본 판의 고유번호를 보면 납득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438권째의 『불설마니라단경』부터 뒤의 7종이 같은 438의 번호 아래 들어가 있고, 1,224 번호에는 12종이 들어가 있으며 1,228번에는 3종이, 1,230에는 5종이, 1,238에는 2종이 같은 번호 밑에 들어가 있다.(다른 나라 대장경에서는 이들이 각각 고유한 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들을 하나의 독립된 종으로 보아 순서를 매긴 북한판 해제본의 방식이 외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고려해보면, 우리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1,538종(북한판) 해제본 종수 1,537종에다 그들이 빼놓은 보유장경 목록집을 더한 것)에 6,844권, 81,240매의 경판으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나 대중들을 위해서라도 정확한 기준에 의거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할 만한 수량 결정이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온 나라가 몽고군의 창칼 아래 짓밟히고 난을 피해 도읍을 강화로 옮겼던 피난 시절에 그 많은 불전들을 모아 정리 · 교정 · 편찬을 해내면서, 또한 판목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하나하나 새겨넣어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 수백 명의 명필과 조각사들이 동원되어 일했을 터인데도, 경판의 그 수백만 글자가 틀린 자나 빠진 자가 없이 바르게, 그것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필체가 한결같음을 보면 신기를 접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 같은 분도 팔만대장경을 보고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요, 마치 선인들이 쓴 것 같다”고 찬탄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16년의 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고종 38년(1251)에 고려팔만대장경은 완성을 보게 되었다.
총1,538종의 엄정한 불전이 권수로는 6,844권으로, 내용을 빽빽이 앞뒤로 아로새긴 경판으로는 총 81,240매에 이르러 거대한 대장경으로 완비된 것이다.
이토록 정성을 다하여 완성한 귀중한 법보를 처음에는 강화 서문밖에 판당(判堂)을 짓고 모셔두었다가 오래지 않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모셔두었다.
강화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당시 최고 통치자였던 최우(최이崔怡라고도 부른다)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심혈을 기울여 세운 시찰로서,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히는 큰절이었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대장도감도 바로 이 선원사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충렬왕 대에는 원나라에 대하여 일어난 반란군이 고려로 쳐들어왔을 때 왕이 피난하여 임시 궁궐로 쓰기도 했던 곳이다.
- 보전과 소실 위기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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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 팔만대장경은 태조 7년(1398년)에
서울 지천사(支天寺, 현재 서울 시청 맞은 편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왕족실록 <태조실록>5월 10일조의 기사에 보면, 태조가 용산강(龍山江)으로 친히 행차하여 강화 선원사로부터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다음날에는 비가 오는 가운데 2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지천사로 옮기되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력들이 독경하였다고 적고 있다.
지천사에 모셔졌던 팔만대장경은 여름철 우기가 지나고 가을 들어 곧바로 다시 해인사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데, 정종 원년 정월초 9일조 기록에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해인사에서 장경을 인출하는 승려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게 하는데, 태상왕(은퇴한 태조 이성계)이 사재로 대장경을 인출하기 위하여 동북백(함경도)에 조와 콩 540석을 단천 · 길주의 두 창고에 납부하고 그것으로 해인사 근처 고을에 있는 쌀과 콩을 그 수효만큼 교환케 하였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바로 그 해 말에 해인사로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을 옮기는 행렬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와 함께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열었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거나 지게에 이거나 머리에 이고 행렬을 이루어 나아갔을 것이다.
이 행렬은 서울 지천사에서 시작하여 장호원과 충주를 지나 조령 · 문경 · 점촌 · 구미를 통과하여 장경나루를 거쳐서 해인사 판전에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배를 띄워 대장경판을 싣고 서해 바닷길을 통해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에 이르러, 그곳에 배를 대로 해인사까지 운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개포마을의 이름도 ‘경을 풀었다’는 뜻에서 나온 ‘개경포(開經浦)’가 전화된 것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머나먼 합천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지면서, 해인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법보종찰(法寶宗刹)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왜구들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극성을 부리게 되는데, 강화에도 여러 번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자행한 사실이 나와 있다.
고려말에 왜구 소탕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기할 수 있었으나, 팔만대장경을 강화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는 위치상 외적의 침입이 미치기 어려운 곳인데다 그 이전 고려시대에도 <고려왕조실록>를 보관했던 사고지였고, 화엄사찰로서 교종의 뿌리가 깊었기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조선 태조는 해인사를 팔만대장경의 최종 보안지로 확정하였다.
팔만대장경이 보안되어 있는 해인사 대장경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의 60간짜리 165평씩의 두 긴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판고로서,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 부르는데,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 기능을 위해 일체의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전통 과학의 우수성이 독창적으로 발휘된 건물이다.
세 가지 재앙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는 해인사는, 그러나 내부에서 대규모의 화마(火魔) 재앙을 맞곤 했다.
조선시대에 7번이나 대화재가 나서 그때마다 해인사 건물들 대부분이 소실되어 힘들여 중창해야 했다.
하지만 이 대장경판전만은 조선 초기 태조대에 지어진 뒤, 조선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정희왕후 윤씨의 뜻을 받들어 30간을 증개축한 일이 있을 뿐, 대화재 속에서도 조금도 다치지 아니하고 기둥 한 군데 기울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판가(板架)의 진영장치뿐 아니라 주변 환경과 공기의 흐름을 정확히 이용하는 통풍방식, 방습을 위한 배부 구성, 인경작업할 때의 편의성 등이 완벽히 조정되어 있어서 가히 전통과학의 보고라 할 만하다.
팔만대장경이 위기를 맞은 것은 대화재 때만이 아니었다.
선조 연간 임진년(1592)에 왜군들이 대규모로 침입, 부산포에 상륙하여 이후 전국을 병화로 몰아 넣었을 때 팔만대장경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
임진년 4월 13일에 침공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5일에는 동래, 17일에는 양산 · 울산, 19일에는 밀양 들로 파죽지세 진군하여 21일 창원 · 창녕으로 휩쓸고 들어와 거창을 점령하고 지례를 지나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해 들어 왔다.
불과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이 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것이다.
왜군이 거창이나 성주에서 한발 옆인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을 약탈하는 것은 이제 죽먹기보다 쉬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우리 팔만대장경본은 물론 그 경판 까지도 줄곧 눈독들이고 요구해 오고 있었던 터였고, 조선의 우수한 문화재와 장인들을 우선적으로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거창의 김면(金沔)장군,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장군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이었다.
망우당(忘憂當) 곽재우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의령에 묻혀 살다가 41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맞자, 개전10일 만인 4월 24일 가솔 5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낙동강 지류로 움직이는 왜군의 유통로를 초반에 막아버렸다.
그러자 곧 거창에서는 의병장 김면이,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주요 읍성을 점령한 왜군의 준동을 갸야산에 의지하여 막아냈다.
송암 김면과 내암 정인홍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중앙 벼슬자리를 사퇴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소암대사는 휴정(休靜) 서산(西山)대사의 제자로서 임진왜란을 맞자 승병을 모아 해인사를 수호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주를 점령한 왜군들 일부가 해인사로 접근하자, 승병들을 이끌고 절로 들어오는 앞의 큰 산고개를 막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지금도 그 산고개를 왜구치(倭寇峙)라 부른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힘을 합쳐 5,000의 의병으로 낙동강 동쪽 현풍 · 창녕 · 영산 등지의 왜군 제9군 11,500명과 대결, 이들을 영산성으로 몰아붙이고는 다시 성주성으로 쫒아냈고, 김면 의병군과 정인홍 의병군은 합동으로 손금보듯 잘 아는 고향 땅 지세를 방패삼아 성주성에 몰린 2만 왜군의 발목을 묶었다.
성주성을 둘러싼 8월과 9월, 12월의 대규모 의병 공격에 몰린 왜군은 이듬해 1월에 개령 · 선산 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됨에 따라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가야산을 의지한 경상도 의병이 펼친 전대미문의 유격전쟁과, 해인사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승려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의병장 김면 장군이 이듬해인 계사년(1593)에 전장에서 과로로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시는 당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우리 조상들의 절절한 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 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兄知有國 不知有身)"
치욕적인 일제시대를 지낸 뒤, 팔만대장경이 또 한 번 중대한 소실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민족 상잔의 비극이 전개되었던 6.25 전쟁 때였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그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가야산에 숨어 가야산 줄기와 계곡의 요처인 해인사를 중심으로 주변 숲을 진지화해서 소탕작전을 펴는 국군과 맞섰다.
운명의 기로는 195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토벌을 진행하던 육군이 공중지원을 요청하여 해인사 주변의 공비를 폭격해달라는 주문을 낸 것이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는 각각500파운드 폭탄 2발씩과 5인치 로켓탄 6발씩을 장착하고 있었고 특히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어서, 투하했다 하면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인민군의 소재지를 파악한 정찰기가 백색 연막탄을 투하해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폭격지점으로 가리키자, 즉각 미군사고문단에서 폭격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런데 1번기를 기수로 해서 4대의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가던 그 순간, 갑자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김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인민군의 지상포화가 교차하는 속에 기총소사로 공격하던 비행편대에 다시 정찰기로부터 폭격 재촉 명령이 떨어졌다.
“해인사를 네이팜탄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령을 들은 기장들은 인민군들이 공격을 피해 해인사로 몰려가고 있으니 빨리 폭격을 하자고 편대장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날카롭게 명령을 뒤집었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러고는 기수를 돌려 몇 바퀴 선회하다가, 몇 개 능선 뒤의 성주쪽 인민군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 날 바로 미군사고문단이 윌슨 장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령불복종을 항의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여 김 대령을 총살이 아닌 포살(砲殺)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때 배석하고 있던 당시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명령불복종 행위를 겨우 무마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해인사 폭격에 맞섰던 김영환 대령의 형이기도 했다.
그 날 저녁, 미군사고문단 책임자가 국군전대본부를 방문하여,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편대원 전원과 작전참모 장지량 중장 등과 한자리에 모여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인 명령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했다.
이에 대하여 죽기를 각오한 김영환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아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투철한 군인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민족의 유산 팔만대장경을 지키려 했던 김영환 대령은 그 뒤 1955년 강릉 지구에서 순직했다.
민족적 자긍심과 참된 기개를 가진 김 대령이 거기 없었던들, 팔만대장경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뒤 현대에 이르기까지 750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고 화재를 맞았음에도, 그 대규모의 전질 모두가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게 보안되어 있으니 실로 신비롭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고려팔만대장경의 인출 및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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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은 양적으로 대규모여서 인출(印出)하는 일도
소요 인력과 물적인 동원면에서 국가적인 결정이나 지원이 없이는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에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행차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팔만대장경 판각을 완료한 뒤 처음으로 전질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고려 말기의 충숙왕대나 우왕대에 여러 번 인출작업이 수행되었는데,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이 아버지 이곡(李穀)의 서원을 받들어 우왕 7년(1381)에 여러 곳의 도움으로 인출하여 여중 신륵사의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은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억불정책이 줄곧 진행되었던 조선조 500년 동안 인출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태조 2년(1393)에 왕명으로 인출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고, 정종 · 세종대에도 인출 기록이 보이며, 세조 4년(1458)에는 왕이 신미(信眉) 등에게 명하여 50질을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도 20질이 인출된 기록이 있다.
그 뒤 고종 2년(1865)에는 2질을 인출하여 오대산 적멸보궁과 설악산 오세암에 각각 한 질씩 봉안하였고, 1899년에는 상궁 최씨의 발원으로 왕실 내탕금과 성금을 모아 4질을 인출하여 해인사 · 통도사 · 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한 질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 질은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7년 뒤인 고종 광무 10년(1906)에도 왕실에서 내탕금 6만 전을 들여 1,400권을 인출하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봉안했다.
- 자랑스런 인류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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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팔만대장경의 영향력은 비단 우리나라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출된 팔만대장경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불교문화에 중대한 촉진제가 된 사실은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과거 일본에서도 대장경 사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는데, 고려팔만대장경이 완성되자 스스로 판각하기보다는 이 팔만대장경의 수입을 갈구해마지 않았다.
고려후반부터 사신들을 보내 장경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고 조선 초기에 이르면 태조대에 4차, 정종대에 7차, 세종대에 9차에 걸쳐 각종 공물을 바쳐오면서 대장경을 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판 자체를 무리하게 요구해온 것도 3차례나 되었다.
세종대에는 일본 국사가 들어와 대장경판을 하사하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면서 집단으로 단식하다가 6일 만에 그만둔 웃지 못할 일까지 있었다.
이렇듯 우리의 팔만대장경본은 수십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불교문화의 발전에 촉진제가 되었다.
일제시대 초기인 1915년 당시 총독이었던 테라우치는 교토의 천용사에 봉안하고자 인출했는데, 그 뒤 동경제대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1923년 동경대지진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에 인출된 또 한 질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37년에는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2질을 인경하여 선물로 보낸 적이 있으나 만주국이 붕괴되면서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다른 한 질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안장하기로 했다가 사정상 영변 보현사(普賢寺)에 봉안하였는데 현재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후신인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일본은 인출해간 우리 팔만대장경본을 정본으로 삼아 메이지 연간에 송 · 원 · 명대의 대장경본을 교합하여 축쇄장경을 펴냈고, 타이쇼 연간에도 팔만대장경본을 바탕으로 삼아 오늘날 한자권 불교정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정신수장경을 엮어냈다.
결국 팔만대장경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불교정전의 원본인 셈이다.
한 예로, 1986년 영국의 동양학자 제임스 레그(james Legge)가 법현(法顯)의 『불국기』를 영역할 때 사용한 텍스트가 바로 우리의 팔만대장경본이었다.
마지막 인경작업은 1963년부터 1968년에 있었다.
설제(設題) 김두호(金斗鎬)가 문공부의 인출 허가를 받아 총 13질을 인경하여 국내에는 동아대 1질, 동국대 1질, 성균관대 1질, 중동중고등학교에 1질을 봉안했고, 국내외로는 일본 사천왕사(四天王寺) 1질, 비예산사(比叡山寺)1질, 고야산사(高野山寺)1질, 일본국 국회도서관 1질,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1질, 영국에 2질, 호주에 1질, 대만에 1질을 보냈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해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여 총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완성,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 나라의 유명 도서관에 보냈다.
불교문화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우리 팔만대장경의 우수성이 전 세계 불교학계에 알려지면서,
유네스코에서는 1995년 우리나라의 석굴암 · 종묘와 함께 경판을 봉안한 대장경 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2007년 고려 팔만대장경을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그 문화적 가치와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우리 후손들 모두가 길이 보전해야 할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확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