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보다 43년 뒤인 천복(天福) 8년(943, 고려태조 26년)에 지어진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의 잘되고 못 됨은 곳에 달려 있고, 땅의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다.
가야산(일명 牛頭山) 해인사는 해동의 명찰이다.
옛날 양나라 때, 보지공이 임종할 때에 「답산기」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고려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니 그때 그들에게 이 「답산기」를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과연 신라의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보지공의 제자가「답산기」를 내어 주면서 공이 임종할 때 하던 말을 전하였다.
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공의 묘소에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밤낮 이레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
어느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공이 나와서 법을 말씀하고 의발과 신발을 전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하고는 다시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때 마침 신라 제 39대왕(40대의 잘못임)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는데, 어떠한 약을 써도 효력이 없으므로 임금이 신하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고승 석덕의 구호를 찾고 있었다.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늘에 치솟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 여겨, 산 아래에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수십리나 들어갔으나 시내가 깊고 골짝이 좁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두 스님은 허락하지 아니 하였다.
"이 실 한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병이 곧 나으리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임금에게 여쭈었더니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 절을 짓게 하였으니, 때는 애장왕 3년(802) 임오(壬午), 당(唐)의 정원(貞元) 18년이다.
임금이 친히 이 절에 와서 전답 2천 5백결을 시납하고 경찬하였다.
(하략)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은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의 '천복팔년계묘시월의판성적'이란 간기에 의해 이 글이 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졌다는 것만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어떻든 이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앞에 인용한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다.
그런데 신림은 의상의 제자였으므로 결국 순응은 의상의 손제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에서」말하는 이른 바 화엄십찰의 하나로 해인사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보지공의 제자로부터 「답산기」를 전해 받고 또 이미 250여 년 전에 죽은 보지공으로부터 우두산에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창건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하는 「가야산해인사고적」의 기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것은 해인사의 창건을 신비화시키고자 한 후세인들 심리적 표현의 결과라고 하겠다.
넷째,
해인사의 창건에는 신라 왕실의 각별한 도움과 후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는 성목왕 태후의 귀의와 대시주를 말하고 있고, 「해인사고적」에서는 애장왕비의 난치병 치유가 인연이 되어 애장왕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여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실의 도움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이다.
애장왕은 서기 800년에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숙부인 언승이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왕 3년에 아찬 김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 6월 정월에 비 박씨를 왕후로 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으므로 왕 3년에 왕후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해인사고적」의 기록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심이 강했던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왕 태후가 해인사 창건의 대시주였다는 최치원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