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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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종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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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려대장경

대장경의 조성과정

이렇듯 군신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호국의 일념으로 시작한 대장경 조성사업은 워낙 대규모의 국가 사업인지라 따로 진주 지방 남해연한에 분사도감을 설치하여 판각을 나누어 진행하였다.
군사도감 장소로서 진주 남해가 정해진 까닭은 그곳이 몽골의 병화가 미치기에 쉽지 않은 남해안 지방인데다 당시 무신 권력의 핵심인 최우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고,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한 경판재료를 가까운 거제도에서 마음껏 구하여 바닷가에서 제대로 제작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경 판각에 앞서 그 내용을 교정하고 새로이 편찬하는 책임자로는 당대에 화엄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개태사(開泰寺) 승통 수기(守其)대사가 맡았다. 그는 30여 명의 학승들을 거느리고 팔만대장경 경문을 교정할 때 기존에 인출해놓은 우리의 초조대장경본과 송나라 대자경인 북송관판대장경본, 그 사이에 나온 거란대장경본을 엄밀히 비교 · 대조하여 착오를 상세히 정정하고 빠진 부분을 보완했으며, 그 동안 각 나라에서 모은 독자적인 불전들과 그밖에 『개원석교록』과 『정원석교록』 같은 일급 불전목록을 참고자료로 삼아 완벽한 대장경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수기대사는 법량이 광활하고 법안이 명쾌하여, 대장경을 교정봄에 있어 각종 자료들을 변증하고 옥석을 가리는 것이 헌헌장부 칼 휘두르듯 막힘 없이 자재하여,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기가 마치 자신의 저술을 검열 보듯 했다. 수기대사는 그 교정의 엄밀한 과정을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30권을 따로 만들어 팔만대장경 안에 수록하였는데, 이 『교정별록』은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정본으로 하게 된 경위를 상세한 근거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어서, 그 자료적 가치가 절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에서는 대장경 판각을 위한 경판 재료를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기록에는 없으나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2년 뒤에 본격적인 판각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미루어, 경판 재료는 적어도 그 5년 전인 1234년, 그러니까 강화 천도를 결행한 지 2년 뒤인 고종 21년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판을 만든 재료는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白樺木)로서, 거제목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추정해보면 하나의 완전한 경판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했는지, 그 대규모의 까다로운 공정을 어떻게 하나처럼 완벽히 수행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경판 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원목을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구어 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내서는 그늘에 말린 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판을 만든다. 완성된 밑판은 판각하는 곳으로 옮겨지고, 판 각수들은 여기에다 편찬 교정이 끝난 경의 내용을 구양순(歐陽詢)필체로 경판 수치에 알맞게 정성껏 써놓은 사경원(寫經員)들의 판하본을 붙여 한자한자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다.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하고 마무리 손질을 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네 귀에 동판(銅版)으로 장식하여 한 장의 경판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성들여 세심하게 제작한 까닭에 7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판들 모두가 썪는다든가 좀먹는다든가 뒤틀리는 일 없이 온전히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판은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3.6cm)이며, 약3.5kg쯤 무게가 나간다. 판면은 가로 1척 5촌(약 45.5cm), 넓이 7촌5분(약 22.7cm)으로 위아래에 경계선을 그었고, 한 면에 23행씩 행마다 14자씩 앞 뒤 양면에 444자쯤 새겼다. 새긴 글자의 크기는 사방 5분(약1.5cm)쯤이다. 판의 뒷면 끝에는 새긴 경의 제목, 장수(張數), 천자문 차례에 따른 함이름을 새겼고, 경판 양쪽 끝 각목에도 같은 표시를 새겨 정리하고 찾기 쉽게 해놓고 있다.
이렇게 조판하여 완성한 고려팔만대장경의 수량은 정확히 얼마나 될까? 이에 관하여서는 조사자들에 따라 파이가 적지 않은 실정이고 정설이 없다. 일제시대 총독 테라우치가 일본 천용사(泉湧寺)에 헌정하려고 인경(印經)할 때 조사한 것이 표준으로 여겨져왔는데, 그에 따르면 팔만대장경의 종수는 1,512종에 6,819권, 총81,258매의 경판이 있는 것으로 조사 보고되어 있다. 고려팔만대장경 자체의 대장목록에는 책종과 그에 따른 권수, 장수만 표시되어 있고 총계가 없다. 대장목록에 따라 계산하면 1,524종에 6,569권이 되는데, 목록과 각 경판의 실제 수량에 차이가 다소 있는데다 보유장경까지 넣고 있어서 혼선이 생기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총괄하여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에는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정장 1,497종에 6,558권, 보유정장(부장) 4종에 150권, 총 경판 81,258매로 적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조사 보고로는 경북대학교 서수생 교수의 것이 세밀하데, 그는 팔만대장경 정장 수량을 1,524종에 6,606권, 78,500매의 경판으로 보고, 보유장경판 17종 238권, 2,740매의 경판을 더하여 총 1,541조에 6,844권, 81,240매의 경판에 160,642장의 장수를 가진 것으로 자세히 내역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종수만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대 중반에 인출한 팔만대장경을 정본화하여 고유번호까지 매겨 세계 각 나라에 보낸 동국대학교 팔만대장경 영인본에는 팔만대장경의 고유번호가 1,514까지 매겨져 있다. 말하자면 1,514종의 불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판 팔만대장경 해제는 팔만대장경의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번호를 붙여가며 각 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풀이한 것인데, 여기서는 1,537로 끝을 맺고 있다. 서수생의 1,541종은 보유경판의 『대장일람』, 『대장일람집목록』까지 포함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동국대 영인본 판의 고유번호를 보면 납득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438권째의 『불설마니라단경』부터 뒤의 7종이 같은 438의 번호 아래 들어가 있고, 1,224 번호에는 12종이 들어가 있으며 1,228번에는 3종이, 1,230에는 5종이, 1,238에는 2종이 같은 번호 밑에 들어가 있다.(다른 나라 대장경에서는 이들이 각각 고유한 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들을 하나의 독립된 종으로 보아 순서를 매긴 북한판 해제본의 방식이 외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고려해보면, 우리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1,538종(북한판) 해제본 종수 1,537종에다 그들이 빼놓은 보유장경 목록집을 더한 것)에 6,844권, 81,240매의 경판으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나 대중들을 위해서라도 정확한 기준에 의거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할 만한 수량 결정이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온 나라가 몽고군의 창칼 아래 짓밟히고 난을 피해 도읍을 강화로 옮겼던 피난 시절에 그 많은 불전들을 모아 정리 · 교정 · 편찬을 해내면서, 또한 판목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하나하나 새겨넣어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 수백 명의 명필과 조각사들이 동원되어 일했을 터인데도, 경판의 그 수백만 글자가 틀린 자나 빠진 자가 없이 바르게, 그것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필체가 한결같음을 보면 신기를 접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 같은 분도 팔만대장경을 보고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요, 마치 선인들이 쓴 것 같다”고 찬탄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16년의 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고종 38년(1251)에 고려팔만대장경은 완성을 보게 되었다. 총1,538종의 엄정한 불전이 권수로는 6,844권으로, 내용을 빽빽이 앞뒤로 아로새긴 경판으로는 총 81,240매에 이르러 거대한 대장경으로 완비된 것이다.
이토록 정성을 다하여 완성한 귀중한 법보를 처음에는 강화 서문밖에 판당(判堂)을 짓고 모셔두었다가 오래지 않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모셔두었다. 강화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당시 최고 통치자였던 최우(최이崔怡라고도 부른다)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심혈을 기울여 세운 시찰로서,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히는 큰절이었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대장도감도 바로 이 선원사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충렬왕 대에는 원나라에 대하여 일어난 반란군이 고려로 쳐들어왔을 때 왕이 피난하여 임시 궁궐로 쓰기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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