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보물 팔만대장경을 품고 있는 법보종찰 해인사의 위상은 드높다. 자운 성철 일타 혜암 법전스님 등 셀 수 없이 수많은 선지식들이 이 곳 가야산중에서 수행하고 가르침을 펼쳤다. 한국불교의 정신적 토대를 닦은 ‘조정(祖庭)’이라 일컬을 만하다. 조계종단 최초의 총림이기도 하다.
해인사 선원의 이름은 소림선원(少林禪院)이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가 주석했던 소림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벽암록>에는 자신의 불사(佛事) 공덕을 자랑하는 중국 양나라 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무심(無心)’의 선법을 펼친 달마의 일화가 나온다.
양무제는 3000여 개의 절을 짓는 등 부처님의 가피를 받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에게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며 얼마만큼 공덕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보상을 바라는 양무제에게 달마는 ‘그딴 건 없다’며 일침을 가했다. 무심의 눈으로 덧없고 실체 없는 허상을 일깨워준 것이다. 부하의 반란으로 황궁에서 쫓겨나 굶어 죽은 것이 양무제의 최후였다. 집착을 갖고 무언가 바라는 이에겐 달마의 가르침처럼 공덕과 자비는 없던 셈이다.
반면 온갖 거품과 기름기를 걷어낸 마음엔 모든 것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와 ‘자비’가 남는다. 이를 찾기 위해 올해 하안거에도 31명의 스님이 소림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과거에 비하면 그 숫자가 적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질(質)은 양(量)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8월25일 소림선원을 찾았다. 윤달이 겹쳐 9월2일이 해제일이니, 이제 안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집중호우, 폭염 그리고 태풍까지. 유난히 바깥세상은 요란했다. 그럼에도 이번 한 철도 수좌들은 치열했고, 옹골차게 살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입선과 방선으로 본래 있는 불성을 뒤덮고 있는 뿌연 먼지를 걷어내려 노력했다. 해인총림 동당 세민스님(조계종 원로의장)과 유나 원타스님도 이번 하안거 용상방에 이름을 올렸다. 세수가 여든이 넘은 세민스님은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말을 아꼈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충분히 귀감이 됐다.
하안거를 마치는 마지막 일주일간은 용맹정진으로 정점을 찍는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스님이 선종 가풍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50여 년을 넘게 내려온 소림선원만의 특징이다.
‘용맹(勇猛)’이란 수사에서 느껴지듯이 그 무게감은 엄중하게 다가온다. 한시도 눈을 붙이지 않는다. 공양 시간과 청소를 제외한 18시간을 오로지 정진에 몰두한다. 잠을 잔다는 기본적인 욕구를 버려서까지 본래 마음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눈 푸른 납자들에게 세인의 방문이 반갑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이곳만큼은 달랐다. 조심스럽게 건넨 취재요청에 소림선원장 효담스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기자는 글 쓰고 사진을 찍어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게 일이고, 수좌들은 본래 마음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게 일”이라며 “각자의 역할을 잘하면 된다”고 웃음 지었다.
군더더기 없이 포장하지 않은 그 자체가 선(禪)과 맞닿아 있었다. 그렇게 용맹정진엔 승가대학 학인 스님까지 더해 40여 명의 스님들이 동참했다. 혼자 한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대중이 함께하니 가능했다. 수행 공동체의 힘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용맹정진을 마친 선원장 효담스님과 만났다. 하안거 의미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적절한 비유를 섞어가며 쉽게 설명했다. 안거를 꾸미는 상투적인 낱말에 갇히는 걸 경계했다.
용맹정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수사에 으레 겁먹기 보다는 수행을 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결의를 다지는데 의미가 있다”고 단언했다.
효담스님의 화두는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매 철마다 안거를 하며 끊임없이 수행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라는 분별에 가려 있는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흔히 감기가 걸리면 약을 먹고 낫습니다. 이렇듯 건강은 어디에서 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 안에 있던 게 다시 회복하는 거죠. 우리가 하는 수행도 우리 안에 부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전등록>엔 똥을 던지면 한나라 똥개는 그걸 먹으려고 쫓아가지만, 사자는 똥을 던진 사람을 물어버린다는 ‘한로축괴(漢盧逐塊) 사자교인(獅子咬人)’이 나온다. 범부는 똥이라는 생각을 쫓지만, 도인은 생각을 준 그놈을 물어버린다는 교훈이다.
온갖 분별과 편견 증오 시기 두려움 등등. 결국 인간을 망치게 하는 건 생각이 화근이 된다. 한 생각을 버리면, 아니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게 부처다.
용맹정진까지 원만히 마친 스님들은 이제 안거를 정리한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날 것이다. 사실 결제란 말도 해제란 말도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일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는 이들에겐 결제도 해제도 없었다.
해인사=이성진 기자 sj0478@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