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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자서전, 물고기 잡은 뒤의 통발 같지만 … ” 중앙일보[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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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0-01-11 15:30 조회10,9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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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물고기 잡은 뒤의 통발 같지만 … ” 

몇 년 전에 난생 처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 당황스러움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해인사에서 오랫동안 관여했던 월간지에서 ‘전관(前官) 예우’를 한답시고 이루어진 인물 취재였다. 사진 찍던 사람이 도리어 찍히는 기분인지라 내심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옛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했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요령을 부렸다. 편집자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서면 질문지를 받아 스스로 모범답안을 작성했던 것이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길지도 않는 세월의 흔적 속에서 외형이나마 그럴 듯한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결국 평범한 필자가 어느새 ‘꽤 괜찮은 인물’로 그려져 있는지라 스스로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다.

얼마 전에 유수사찰 사보(寺報)에서 두 번째 인터뷰 요청이 왔다. 대담자와 평소 친분이 있어 편안한 덕에 사적인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얼굴이 두꺼워진 것인지 내공이 쌓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몇 년 사이에 나도 모르게 약간 용감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쨌거나 자기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금 알았다. 두 번의 인터뷰 기사를 합친다면 나의 부분적인 자서전은 될 것 같다.

사실 자서전은 아무리 솔직하게 쓴다고 해도 그건 현재 남아 있는 기억에 의해 다시 구성된 허구(虛構)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억 자체가 탈락과 변형 과정을 거친 결과물인 까닭이다. 그래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해도 그게 오히려 역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바뀌어버리는 근원적인 한계를 지닌다. 아예 의도적으로 버리고 싶은 과거 위에 부풀려 포장한 업적을 덧씌우면서 사실과 다른 자기를 재창조하기도 한다. 또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마치 그렇게 되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결과론적 해석을 내놓는 함정 속으로 스스로를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서전은 십중팔구 외면받기 쉬운 위험한 장르이기도 하다.

친일 인명사전의 명단에서 빠지고 싶은 것처럼 누구나 살다 보면 덮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복두장이처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쳐야 할 일도 많다. 그래서 자서전의 가장 큰 심리적 역할은 자기 정화라는 카타르시스 기능이라고 했다. 때론 자기 방어 본능에서 나오기도 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세 번의 자서전을 남겼다. 평론가들의 혹평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쓴 까닭이다. 모두가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다.

성직자들만큼 고백을 좋아하는 부류도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남의 고백만 해당된다. 정작 자기 고백은 대부분 소홀한 법이다. 그 이유는 늘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온 탓이다. 그리고 항상 자기보다 똑똑한 남을 가르치려고 든다. 중세도 그랬고 요즘도 마찬가지다. 사실 황금사슬이든 오랏줄이든 얽혀 매여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종교에 얽매여 있는 것이나 세상일에 얽매여 있는 것이나 얽매인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노름하다가 소를 잃으나 책을 읽다가 소를 잃으나 결과적으로 소를 잃어버린 점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는 선행, 그리고 사슬의 재료인 황금에만 집착한다. 이것이 종교인이 가진 한계다.

사실 제대로 된 고백이란 솔직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생각에 힘을 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종교인의 자서전 중에서 솔직함으로 가장 유명하다. 달라이 라마 성하의 자서전 『티벳! 나의 조국이여』는 망명객의 진솔한 아픔이 녹아 있다. 문선명 목사의 자서전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솔직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읽지 말자’고 외치는 안티 그룹도 있었다. 어쨌거나 누구든지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인에게 헌상하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이다.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감동을 주기에 일부 자서전은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얼마 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의 자서전 『누구 없는가』가 서점에 나왔다. 출간을 위해 필자도 곁에서 미력이나마 보탰다. 스님을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봤지만 언제나 별로 말씀이 없다. 어릴 때 어머니조차 ‘차갑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항상 혼자였다. 딱히 정해놓고 자주 찾아오는 도반(道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 나면 참선하고 마당에서 풀 뽑고 또 산에서 나무하고 포행(匍行·산책) 다니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혹 아랫사람에게 시킨 일이 그런대로 흡족하면 잠깐 밝은 표정을 지었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표정했다.

그런 성정인 스님을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책을 만들어 드린다고 몇몇이 뜻을 모았다. 몇 년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기억을 더듬어 보시라’고 떼 아닌 떼를 써야 했다. 팔순이 넘은 연로하신 어른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을 시킨 것이다. 물론 구술(口述)을 턱 밑에 앉아서 받아 쓴 이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불원천리하고 주변인까지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못할 짓들이 모인 결과가 이 책이다. 어쨌거나 친설(親說)을 통해 ‘고전적 선승’의 수행과 삶이라는 한 평생 궤적을 담담한 고백으로 들을 수 있었다. 개인사를 통해 한국의 근세 백년사를 고스란히 녹여낸 것이 이 작업의 가치라고 서로 치켜세우면서 자화자찬했다.

문선왕(공자)께선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말했다. 늘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할 뿐 새롭게 지어낸 것은 없었다고 했다. 아난존자는 항상 ‘이와 같이 들었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경전의 서두를 장식했다. 자서전 펴내는 일을 도우면서 ‘술이부작’과 ‘여시아문’이란 말을 유달리 강조했던 두 성현의 속내까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읽혀졌다.

결론적으로 자서전이란 것이 어떤 이에게는 물고기를 잡고 난 뒤의 통발 같은, 혹은 강을 건넌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할 뗏목처럼 쓸데없는 허망한 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은 할 터이다.

원철 조계종 총무원 불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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