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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해인〉 25주년에 비친 불교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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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07-02-14 09:33 조회9,8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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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해인〉 25주년에 비친 불교 잡지
민중 대변하던 죽비소리, 온라인까지 흘러들어
〈월간 해인〉1호와 최신호.

반들반들한 종이 위에 멋스러운 사진과 글. 잡지는 읽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한다. 그간 잡지는 신문과 책 사이에서 ‘동향을 다루면서도 전문성을 확보해’ 나름의 입지를 조성해왔다.

특히 ‘불교 잡지’는 100여 년 동안 교계, 사회 안팎에 소식을 전달하면서 불교이미지 정립에 일조했다. 우리나라 최초 불교 잡지 〈원종(圓宗)〉이 1910년 12월 창간된 이후 지금에 이르러선 10 종류가 넘는다.

그 중 〈월간 해인〉은 학생회지에서 불교 잡지로 탈바꿈하는 활약을 보이면서 300호를 맞아, 불교 잡지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1〈월간 해인〉 300호 조판하던 날

“해인지는 뭔가 달라도 달라요. 새로운 시도가 많잖아요.”

〈월간 해인〉의 편집 업체인 여래기획의 김정옥 실장이 해인지를 두고 한 말이다. 1982년 창간한 〈월간 해인〉은 당시 스님들의 군사독재에 맞선 평화 목소리로 불교계 얼굴이 됐다.

1985-6년‘죽비의 소리’란을 통해 ‘언제나 슬픈 민중’을 보듬고,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감싸안았던 글들은 불자들의 귀감이 됐다. 이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진보적 잡지로서 ‘절집 문화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다년간 지평을 넓혀왔다. 

잡지 등 인쇄·활자 매체가 침체화 되는 경향 속에서, 스물 다섯 장성한 해인지. 창간세대 스님들이 세수 예순 전후가 되는 동안 〈월간 해인〉은 사회 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전법정론(傳法正論)’의 기치만은 지켜나가고 있다.

특집 〈월간 해인〉(발행인 현응 스님) 300호 조판 일인 1월 24일. 〈월간 해인〉 편집장인 종현 스님은 〈월간 해인〉을 ‘디자인’하기 위해 대구 중구 여래기획에 갔다. 이번 300호는 다른 호보다 24페이지 늘어난 68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손봤다. 특집호 속에 지난 해인지 이력, 법전·지관 스님, 가수 김종국 씨 등 애독자 축하문이 다채롭다.

특히 전국 독자들에게서 양해를 구해 모은 1호부터 300호까지의 해인지는 사전 두께의 책 5권 분량에 달했다. 그 방대함 속에 성철 스님 종정 당시 냈던 법어, 불교 교리·사상 강좌 등 불자들의 읽을거리가 총망라 돼 있다.

창간 당시 8페이지였던 첫 호 이후 분량은 1985년 32페이지로 늘면서 8년 전부터 지금의 44페이지로 고정됐다. 뿐만 아니라 〈월간 해인〉 내용은 학생을 위한 법회지에서 사보지로, 이후 불교 현실을 조명하는 잡지로 수준 격상을 거듭했다.

그간 백종하 씨 등 사진 작가들의 활약으로 표지와 지면 디자인도 세련돼 가고 있었다. ‘해인’로고가 담긴 표지는 여섯 차례 바뀌었고, 지면 기획을 담당한 기획사가 대구-서울 등지를 거치며 쇄신을 거듭했다.

‘보는 잡지’로서 문화 시대적 소명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해인지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고려 〈팔만대장경〉의 드높은 가치를 획득해갈지 모를 일이라는 연상이 뒤따랐다.

인터넷 시대를 유념한 해인사에서는 앞날을 위해 1호부터 최신호까지〈월간 해인〉을 전산 자료로 모두 입력해 놓았다. 2002년 편집장을 지낸 원철 스님 업적이다. 이후 웹진 〈월간 해인〉 독자 또한 늘었다. 불교 자료 보고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컴퓨터가 생활화 됐으니 〈월간 해인〉도 달라진 거죠. 요즘엔 기자 원고도 메일로 주고받으니까요.”
종현 스님이 해인지에 몸담은 스님들을 그리워하며 한 말이다. 세태에 맞춰 해인지 구조·매체 성격까지 나날이 새로워진 대신 편집위원 스님들을 자주 못 보는 것은 아쉬운 모양이다.

현 〈월간 해인〉 편집장인 종현 스님.
#2 릴레이 인터뷰 - 역대 월간 해인 편집장들

종림 스님(1988): “초창기 해인지는 오갈데 없는 비주류들이 만든 거에요. 당시 주류는 운동권이었어요. 해인지인들은 운동권이라 하기엔 조직적이지 않았고 이판에도, 사판에도 끼어들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밤낮없이 나누었던 이야기, 새로운 생각들이 불교와 사회를 연결한 고리 역할에 맞았던 거죠.”

성전 스님(1996): “창간 선배님들 덕택에 90년대 해인지 인식은 매우 좋았어요. 특히 지식인 계층에서 인지도가 높았죠. 필자들만 해도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고, 해인지에 글쓰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80년대처럼 한국 사회를 선도하려는 잡지는 아니었지만 사회·문화적 요구를 반영하는 잡지였습니다. 해인지 서울 사무실은 불교를 대변하는 잡지의 상징이었죠.”

원철 스님(2003): “해인지 1세대가 진보, 2세대가 안정화 된 보수적 진보라면, 저희 3세대는 정통화 된 진보적 보수라 볼 수 있죠. 해인지가 서울에서 해인사로 옮긴 것은 어느정도 쇠퇴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해요. 어찌보면 한국 잡지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죠. 전화로 원고를 청탁하고 통장으로 고료를 지불해주는 관례가 정착됐거든요.”

종현 스님(현 편집장): “요즘 해인지는 불교음악산책, 서양의 불교, 사찰음식 이야기 등 재미있는 문화적 소재를 주시하고 있어요. 특히 인터넷 〈월간 해인〉은 DB 구축이 튼튼합니다. 앞으로는 네이버 수준으로까지 검색 기능을 개발하고, 커뮤니티를 활성화해 독자 분들의 참여 공간을 조성할게요. 많이 아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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