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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극락전 한주 도견스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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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07-01-31 15:46 조회9,6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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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의 향기](2) 해인사 극락전 한주 도견스님
입력: 2007년 01월 26일 15:12:45
낙락청송(落落靑松)이 울창해도, 눈 덮지 않은 겨울 가야산은 어쩐지 황량했다. 가야산 골짜기마다 살을 에는 혹한이 이삼일 머물고 있었다.

포행(布行·스님들이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는 일) 나갔다는 노스님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스님은 가파른 산죽숲 오솔길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세수 여든둘. 10여년 전의 중풍 후유증으로 몸은 기울고 자세는 불안정했지만 세월의 때가 반질반질한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내딛는 발걸음은 거침없고 한결같았다.

해인사 동당(東堂) 수좌이자 극락전 한주(閑主)인 도견(道堅)스님. 약속없이 불청객을 끌어들인 상좌 혜일스님(진주 연화사 주지)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순하게 웃었다. “추운데 어딜 다녀오십니까.” “한 물건 들여다보고 오네.” 작달막한 키에 온화한 얼굴. 스님은 섬돌에 천천히 신발을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발목에는 요즘 보기 드문 행전을 치고 있었다.

극락전은 해인사의 노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다. 극락전 위쪽에는 젊은 수좌들이 동안거 결제중인 해인사 선방이 있다. 스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인사 부방장격인 동당 수좌로서 방장스님(조계종 종정 법전스님)과 함께 수좌들의 수행을 점검하고 경책했다.

그러나 이제는 극락전 ‘와선당(臥仙堂)’에 딸린 ‘뒷방’으로 물러나 대중생활과 소임에서는 벗어났다. 스님의 방은 작은 책상과 찻상, 소박한 옷장만으로도 꽉 찰 만큼 비좁다.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다. 노스님은 보기에도 적막한 구석방에서 아무런 일도 서두르지 않고 평생의 남은 시간을 물처럼 바람처럼 지내고 있다.

스님이 스스로 정한 일과는 하루 두차례의 포행. 새벽 3시 도량석 목탁소리에 맞춰 일어난다. 홀로 아침공양을 마친 뒤 휘적휘적 길을 나선다. 신새벽의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시자 대신 뒤를 따른다.

새벽 포행의 첫 행선지는 일주문이다. 일주문에는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모두 버리라’는 뜻이다. 노스님은 이곳에서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부처님 쪽을 향해 예배를 드린다. 고려말 나옹선사가 오대산 월정사 일주문에서 적멸보궁을 향해 예배했다는 일화를 좇아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부도탑을 한바퀴 돈다. 스승인 지월스님, 성철·자운·혜암·일타스님…. 우리나라 선맥(禪脈)을 되살려낸 눈 밝은 스승들의 부도를 어루만지며 열반 후의 소식을 묻는다.

오전 11시, 점심공양을 마치면 극락전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해인사 동쪽 골짜기, 지족암 뒤편에는 일타스님이 비밀스럽게 만들었던 진짜 토굴이 있다. 극락전에서 1시간 거리. 이곳은 요즘 스님의 정진처다. 일반인의 출입이 없는 육각형 토굴에서는 가야산과 앞산의 첩첩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날은 일타스님이 그리워져서 한차례 더 토굴을 다녀온 길이었다. 스님은 “입적한 일타스님이 토굴을 물려줬다”면서 “하루에 1~2시간씩 이곳에 앉아 본래 마음자리가 어디 있는지 살핀다”고 했다.

도견스님은 평생 오십하(夏)의 안거를 회향한 선객이다. 강화도 백련사의 화주보살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어릴 때부터 절에 다녔다. 철이 나면서부터 무엇엔가 이끌리듯 늘 입산할 궁리를 했다.

스님은 열일곱살 때 지리산으로 도망쳐 영원사, 화엄사, 칠불사를 찾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에게 붙들려 끌려왔다. 열아홉살 때 다시 출가를 단행했다. 오대산에 들어가 동관음암에서 홀로 수행하는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위 아래 가사는 물론 양말까지 깁고 또 기운 누더기 차림이었다. 지월스님이었다. 지월스님은 훗날 ‘인욕(忍辱)보살’로 스님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사다. 인욕이란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며 남이 하기 힘든 선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자그마한 암자에서 지월스님과 단둘이 살며 1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다. 스승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처음 몇달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공양은 물론 제자의 빨래까지 손수 해다 바쳤다. 제자의 짚세기도 삼아 줬다. 어느날 스승의 도반이 찾아와 호통을 칠 때까지 제자는 스님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후 스승 시봉하는 법과 불교의식을 제대로 배웠다.

산죽숲 오솔길을 포행중인 해인사 극락전 한주 도견스님. 모든 소임을 거두고 ‘뒷방’으로 물러나 ‘물처럼 바람처럼’ 지내고 있다. 스님은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수행을 하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해인사(합천)/권호욱기자
“스님이 가난한 산꾼에게 있는 쌀을 모두 더덕과 바꿔주는 바람에 둘이서 더덕을 씹으며 겨울을 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천수경’을 외느라 밥을 태워먹었어요. 스승께 용서를 빌었더니 꾸지람은커녕 ‘잘못하는 것은 앞으로 잘할 수 있는 근본’이라며 어깨를 두드려줬습니다. 행자시절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넉넉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동관음암에서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와 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3년간 교학을 공부했다. 한암스님에게는 주로 ‘금강경’을 배웠다. 한암스님은 “너는 전생에 글 하는 소리조차도 못 들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꾸 하다보면 과거의 것이 희미해지고 새로 하는 것이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후 공부에 뚜렷한 진척을 보이자 한암스님은 “우리 집안에 불종자가 하나 들어왔다”고 기뻐했다.

스물다섯살 때 오대산을 떠나 해인사를 찾았다. 생사를 깨부술 각오로 선방에서 3년 결사에 들어갔다. 스물일곱살 때 대구 동화사에서 3년, 서른살 때 부산 범어사에서 3년을 각오하고 선방에 들었다. 그러나 세차례 다 마무리를 짓지는 못했다. 마흔살이 되어서야 송광사에서 3년 결사를 온전히 회향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도 공부로 한철을 났다. 선방 시절 해인사의 효봉·청담스님, 범어사의 동산스님, 송광사의 구산스님, 통도사의 경봉스님 같은 선지식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범어사 시절에는 일타스님과 함께 결제도 해제도 모르고, 밥먹는 것도 잊은 채 화두 타파에 매달렸다. 당대 최고의 율사(律士)로 꼽혔던 일타스님은 주로 해인사 지족암에 머물다가 1999년 열반했다. 도견스님은 일타스님이 미리 써준 자신의 비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스님의 일생 수행지침서는 선종의 이론적 기초를 담은 ‘금강경’이다. 스님의 좌탁에는 항상 금강경이 펼쳐져 있다. 몇년 전에는 금강경 1000여권을 찍어 해인사 율원스님들과 제자, 신도들에게 나눠줬다.

스님은 금강경을 통해 한평생 “시간의 토막도 없고, 큰 것도 작은 것에 포함되고 작은 것도 큰 것에 포함되는 자유자재의 그 ‘한 물건’을 찾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요즘 자율을 강조하다 보니 계율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일반인들도 잡념과 망상, 게으름을 건지는 지렛대인 부처님 계율을 지키면 건전한 생각과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누구나 본래 부처인데 번뇌망상 때문에 부처노릇을 못 하고 있습니다. 숲속에서 나무를 옮길 때 나뭇가지를 다 자르고 나무둥치만 끌어내리는 이치를 생각해보세요. 살생, 도둑질, 음행 등의 욕망의 잔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나무둥치처럼 단단해지고 생활이 건강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수행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도견스님의 제자 10여명 가운데 해인사 율주 종진스님과 백양사 율주 혜권스님 같은 대표적인 율사들이 배출된 것도 스승의 가르침의 힘이 컸다. 제자 혜일스님은 “평소 큰소리 내는 모습을 볼 수 없을 만큼 자비로운 성품”이라면서도 “계율을 지키는 데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당장 가사를 반납하라고 혼내신다”고 말했다.

절집의 스승은 많고도 많다. 서릿발같은 선기로 후학을 다그치는 스승이 있고, 원만함으로 맺힌 마음을 풀어주는 스승이 있다. 도견스님은 다른 선지식들처럼 발군의 경학(經學) 실력이나, 파격의 선기(禪機)를 내보이지는 않는다. 말보다는 침묵과 고요한 미소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하심(下心·겸손)과 근검절약을 가르쳤던 ‘인욕’의 스승 지월선사의 법을 잇는 도견의 가풍이다.

어느새 가야산 일대에 어둠이 뿌려졌다. 해인사는 큰북소리로 하루를 닫고 있었다. 뒷방 노스님은 말을 거두고, 본래 자리에서 그대로 고고했다. 한번도 움직인 바 없던 것처럼. 한 마음도 내보인 적 없었던 것처럼.


〈김석종 선임기자/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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