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제8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6월14일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모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키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번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전 불교도의 경사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 시킬 수 있는 민족의 경사라 할 수 있다.
세계기록유산은 인류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가능한 많은 대중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유네스코가 1992년부터 추진해온 사업이다.
이번에 등재된 팔만대장경은 부처님께서 45년간 설하신 1500여 종류의 경전을 새긴 고려팔만대장경 81,258장과 동, 서 사간 전에 보관돼 있던 해인사 소장 다른 경판과 조선시대 문집들로 그 수량이 약 1만 여장이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법보法寶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 깊다. 국보 제52호로 지정된 이 장경판전은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8년임을 미루어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 무렵인 1488년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棟이 있는데, 여기에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전과 수다라전,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 동의 건물, 즉 동사간전과 서사간전에는 소위, 사간판寺刊版이 보관되어 있으며 모두 158종 5,963판으로 이중에는 28종 2,724판의 국보 제206호와 26종 110판의 보물 제734호의 고려 각판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장경판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판전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소금과 숯 그리고 횟가루와 마사토를 넣음으로써, 방충은 물론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은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각 건물의 앞쪽 창은 아래창이 위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뒤쪽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세계기록문화유산 팔만대장경 호국의 대발원에서 조성되기 시작한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초조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바람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대장경은 1232년 몽고군의 방화로 안타깝게도 그만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로도 계속되는 흉포한 침략에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끈질기고도 필사적인 대몽항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외침에 대처하고 민심을 수습코자 대장도감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장장 16년에 걸쳐 고려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1398년에 다시 해인사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초조대장경에서 속장경,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지는 경판의 제작은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장장 2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이었다. 대장경의 완벽한 제작은 문화국으로서 고려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 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여 그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랑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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