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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유나 원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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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07-02-27 13:02 조회11,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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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유나 원각스님

 

“사람이 제정신 갖고 살게 하는 것이 바로 禪”

중생은 어디서 누구와 공부하느냐가 중요

밖에서 구하려 말고 근본바탕에서 깨쳐야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혜암스님의 상좌인 해인사 유나 원각스님은 지금까지 수좌로 살아왔다. 스님은 “우리가 하는 공부가 본 정신을 회복하는 공부”라고 일갈했다.

원각스님은 해인사 유나 소임을 맡고 있고 전국 최고 재가 선원인 원당암 달마선원 재가자들의 수행도 점검해 준다.

 

선원(禪院)에는 유나(維那)라는 소임이 있다. <사분율>에도 유나 소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오래된 소임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각 소임자들을 통솔하는, 오늘날 주지 스님과 같은 역할을 했다. 총림이 들어서면서 유나는 대중의 질서를 세우는 소임으로 자리 매김 했다. 일반사찰 선원 대표자가 선원장인데 비해 유나는 총림 선원 뿐만 아니라 각 암자와 산중의 입승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원 수좌들의 공부를 점검하고 지도한다. 벽산원각(碧山原覺)스님은 3년째 해인사 유나 소임을 맡고 있다.

 

입춘(立春)을 넘긴 지난 7일 남쪽은 ‘더웠다’. 라디오에서는 전남 여수 지역이 낮 최고 23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소한(小寒) 대한(大寒) 지나고 입춘에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 봄의 시작이지 아직 천기(天氣)는 삼동(三冬)이다. 하늘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았다면 여름같은 겨울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울에 춥고 눈이 많이 와야 그 해 곡식이 풍성하게 열리고 여름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듬뿍 받아야 튼튼한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며 인연의 엄중함이다. 사람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싸움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점만 다를 뿐 인간 역시 처절하리만치 험난한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좌복 위에 가부좌 틀고 앉은 수좌들은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검객’이요 ‘전사’다.

해인사 큰 절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원당암(願堂庵)에 해인사 유나 원각스님이 주석한다. 이곳은 전 종정 혜암스님이 중창하고 열반할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원각스님은 혜암스님의 두 번 째 상좌다. 은사 스님 열반 후 암자 감원을 맡아 스승의 유지를 이었다. 스님은 또 해인사 유나로 해인총림 전 대중들의 입승이기도 하다. 1967년 성철스님과 자운스님 등 해인사 여러 고승들이 간화선 가풍을 잇고 청정도량을 만들기 위해 종단 출범 후 처음으로 총림을 만든 후 초대 유나를 맡은 분이 바로 혜암스님이었다. 원각스님은 원당암 뿐만 아니라 유나 소임까지 스승의 뒤를 이은 셈이다.

결제 중인 스님들을 친견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 공양 시간 밖에 없다. 서울서 온 손님들을 위해 스님은 후원에 일러 미리 점심공양 까지 준비해놓았다. 남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온화한 품성을 지닌 스님이었다. 스님은 한 마디로 정통 수좌였다. 한 평생을 선원을 다니며 화두만을 참구한 수좌 그 자체다.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 차 해인사 약수암에 있다가 봉철스님과의 인연으로 출가했다. 봉철스님은 당시 해인사 중봉 토굴에서 공부중이었는데 가끔 약수암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원각스님은 당시 중증이라고 할 정도로 ‘착하게 산다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님은 “선생님들이 착하게 살라고 했는데 당시 내 생각으로는 내가 대학 들어가면 나 때문에 누군가 들어가지 못할텐데 그러면 착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데 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했다”고 말했다. 그 고민을 봉철스님이 단박에 깼다. “선(禪)과 악(惡) 양변을 여읜 그 자리가 본래 자리”라는 한마디에 천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 길로 하던 공부를 접고 불교 공부에 빠져들었다.

스님은 “〈금강경〉 〈육조단경〉 〈법구경〉 등을 읽고 있는데 스님이 오셨다. 동안거 해제를 하고 스님께서 오셨는데 내가 느낀대로 얘기하니 스님께서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잘못 가르치면 상좌하나에 지옥 하나라던 혜암스님은 공부하러 온 이 청년을 제자로 삼은 뒤 중봉에서 함께 지냈다. “당시 은사 스님은 40대 후반이었는데 한방에서 같이 공부하고 기거했습니다. 내가 밥을 지어 올리면 둘이서 방에서 먹을 때는 바루 공양하고 밖에서 일 할 때는 농구화 신고 부엌에 앉아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혜암스님은 제자에게 자상하면서도 엄하게 가르쳤다. “은사 스님은 방 닦는법, 문 때우고 바르는 법, 밥하는 것을 모두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방을 쓸 때는 종이 장판을 거슬리지 않게 쓸고 빗자루는 들지 말고 밀 듯이 하며, 걸레로 방을 닦을때는 닦고는 바로 밞지 말고 뒷걸음 질 치면서 닦으라는 등 정말 철저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셨으며 항상 모든 일은 이치에 맞게 끔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일상 생활을 익히는 한편 〈초발심자경문〉 을 배웠다. 어떤 때는 해석을 하면 “10년 공부한 수좌보다도 낫다” 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혜암스님은 이처럼 칭찬할 일이 있으면 칭찬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사정없이 꾸지람을 했다.

스님에게 여쭈었다. “수좌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성을 깨쳐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출가자 본분인데 그 본분사에 가장 맞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수좌입니다. 물론 주지나 다른 소임을 맡은 분들도 이 공부는 할수 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 할수 있지요. 해인사에서 처음 총림 할때 성철 방장스님께서 석암스님과 지월스님 두 분 중에 한분이 주지 맡는 것을 권하셨는데 서로 사양하시고 석암스님께서 자리를 피하시므로 어쩔수 없이 지월스님께서 맡으셨는데 지금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무슨화두를 하십니까.”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성철 방장스님께서 시키시는대로 법당에 가서 삼천배하고 ‘마삼근’ 화두를 받았는데 나중에 ‘이 뭣고’ 화두로 바꿨습니다.”

“화두를 바꾸면 안된다는데 괜찮나요?”

“되도록 그 화두가 익었기 때문에 안바꾸는것이 좋은데 공부가 잘되지 않고 다른 화두가 의심이 잘되고 공부가 잘되면 바꿔도 무방합니다.”

스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든 일을 밖으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벌어서 지위가 낮으면 높은데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가도 또 갈등이 생깁니다. 물론 상대적인 만족감은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은 자성, 본래심을 깨달아 거기서 생활할 때 인생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스님은 “구름이 가린다고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이 도리를 깨닫게 되면 불성이 중생성이고 중생성이 불성이지 조금도 차이가 있질 않습니다. 돈을 벌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근본 바탕에서 생활 해야 우리가 모든 것에서 활발하고 자유로워 집니다”라고 덧붙혔다.

“스님 용맹정진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해인사 산중 선원은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여름, 겨울 두 번 7일간 용맹정진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하기 힘들고 대중운김으로 해집니다. 대중이 공부를 절반은 해준다고 하지요. 어쨋든 공부는 애써서 하는 것이 중요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하는데는 스승, 도반, 장소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이나 도인은 그 같은 조건이 상관없지만 중생은 여러 조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런 점에서 해인사가 최적입니다.”

스님은 “토끼가 낮잠을 자다 도토리에 맞아 놀라 뛰니 노루 사슴이 놀라 같이뛰고 그러다 온 산중 짐승들이 뛰고 난리였다. 이에 사자가 한 놈을 잡아 물어보니 자기도 왜 뛰는지 모르고 곁에서 뛰니까 덩달아 뛴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인생이 꼭 그 모양입니다”라며 “자기 본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본정신을 회복하는것이 선”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선은 선택이 아니고 근본 그 자리다. 수좌로서 일관해온 스님은 그러니 제 갈 길을 간 셈이다. 해인사를 들르면 다시 찾아 뵙겠다는 약속을 하고 내려오는 원당암에는 한여름 같은 겨울햇살이 내리 쬐고 있었다. 

해인사=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원각스님은…

혜암스님 은사로 출가

한평생 화두참구 매진

 

1946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1966년 산문에 들어와 1967년 혜암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해인사, 극락암, 송광사, 상원사, 범어사, 불국사, 상무주암, 강진 백련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고 은사스님의 지시로 거창 고견사에서 10여년간 주지소임을 맡았다.

2003년부터 해인사 유나 소임을 맡고있다. 스님은 한편으로 원당암에 마련된 재가불자 선원인 달마선원에서 재가자들의 선수련도 지도하고 있다. 1996년 혜암스님이 건립한 이 선원은 지금도 매년 동안거 하안거 각 100여명씩 결제하는 대표적 재가불자 수행 도량이다.

[불교신문 2303호/ 2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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