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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불교 - 강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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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06-09-07 14:51 조회1,7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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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불교


  신라에 어떤 불교가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불교전래 설화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들이 있다. 


  일성군에 모리라고하는 사람의 집에 묵호자가 왔다. 일성군은 지금의 성산군이며 묵호자라고 하는것은 사람이름이 아니고 모습으로 시커먼 외국인이란 뜻이다.묵호자가 아니고 아도라고 하기도 하지만 비슷하다. 즉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부터 이미 신라에는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300년에 불교가 들어왔고 400년대에는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즉 아무리 신라에 불교가 늦게 들어 왔어도 400년대 초기에는 신라에 불교가 들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그 이유는 400년대왕들의 이름이 불교적인 것들이 보여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는 눌지왕 자비왕 등이 있다. 이는 불교가 이미 왕가에 영양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공인되지 못한 것은 신라가 워낙 폐쇄적인 나라이고  6부족 의장이 큰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폐쇄적인 국가를 열려고 했던 사람이 법흥왕이었는데 법흥왕은 이차돈과 짜고서  불교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무었인가 기적이 있어야했다. 그 기적을 위해서 이차돈이 자기의 목슴을 건 것이다. 불교가 진실하다고 한다면 불교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내 죽음은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화백제도라고 하는 것은 민주적이고 좋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화백제도는 국가경영에  굉장희 큰 마이너스적인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왕이 마음대로 정책을 할 수 없엇기 때문이었다. 마치 동구권이 당이 지배를 하고 대통령은 당이 결정한 것만 실행하는 것과  같은 형태인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 경제를 위축시킨다. 폐쇄적인 국가로 남기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발전시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화백제도의 경우 완전히 만장일치이어야만 했다. 전원 찬성이 가능한 내용이란 보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이 반대하는 의견이 더 좋은 의견일수도 있으며 소수의 의견도 중시할 수 있는 사회도 중요하다. 그런 것이 완전히 무시된 화백제도는 왕권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6부족장의 힘을 줄여야 했으며 그 수단으로 첫째는 중국의 남조 양나라로 양무제가 지배하던 때였다. 양무제는 호불의  왕으로 불교를 바탕의로 나라의 율령체제를 정비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 양무제때 중국이 통일될 기미가 조금 보였으나 양무제의 죽음으로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그러한 양나라를 다녀온 사신의 말을 들은 국가에서 불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즉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불교가 필요했으며 그 결과 이차돈이 죽고 이차돈의 죽음을 통하여 신라에 불교가 공인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공인된 것이지 국교화한 것은 아니었다.  법흥왕 5년때 이렇게 불교는 공인되고 그 다음해에 사찰이 착공되었으나 26년에 중단되어 완공을 보지 못했다. 중단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직 6부족장의 반대가 심했다는  증거이다.       


그것이 와성된 대가 진흥왕 때이며 진흥왕이 그것을 완성시키고 자기아버지때 이루지  못한 그 많은 일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국권이 신장되기 시작하여 결국은 고구려 백제의 영토일부및 가야의 많은 나라들을 병합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아직 고구려나  백제는 아직 불교가 나라를 중흥 시키는 데는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또 진흥왕때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보내지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이 진흥와 말기부터 시작된다. 그다음 선덕, 진덕여왕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사람들중 가장 대표적인 두사람이 원광과 자장이다. 원광은 600년경 귀국하여  642 or 3년경 사망하게 된다. 95세때 사망했으니까 522 or 3년에 태어 났다고 할 수  있다. 그당시 중국은 양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때로 수나라로 통일 하는 시기이다. 즉  통일된 수나라의 모습을 보고 원광은 돌아온 것이다. 이러게 돌아온 원광을 중심으로  일련의 세력이 있었다. 


  자장은 소판 출신으로 태어났다. 소판이란 진골이 가지는 벼슬로 태어날대부터 각관이 될 수 있는 지위를 말한다. 각관이란 지금으로 본다면 재상이나 수상 총리등의 위치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출가하여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후 선덕여왕이 출가를 그만두고 정사를 거들어 달라, 거절할 경우 죽여 버리겠다라고 하여도 이를 거부하고 계율을 지키겠다고 한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광과 자장의 불교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원광은 귀국이후 첫재 세속오계와 걸사표의 두가지 일을 하게된다. 걸사표란 고구려를 쳐야겠는데 군사를 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쓴 글을 말한다. 자기자신은 출가 비구이다. 비구란 거지이다 비록 얻어 먹는 사람이라고 하나 얻어 먹더라도 자기는 신라의 밥을 얻어 먹고 신라의 옷을  얻어 입고 신라의 물을 얻어 마신다. 그리고 또한 신라의 사람이다. 신라의 이익을 위해서 일어서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살생을 일으키기 위한것 이지만 그가 살생을 적극 권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충정떄문이라는 내용의 글이다. 또 그당시 두 사람의 화랑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느냐는 질문에 세속5계를 주게된다.  세속5계중에는 유교적인 표현들도 있지만 불교적인 표현이 두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살생유택이다. 살생유택이란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는 말로 계율불교를 실천했던  백제와는 달리 계율을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이다. 살생을 가려서 해라. 왜냐하면 인간은 살생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계율은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계율은 인간을 자유롭게 그리고 인간을 좀더 풍요롭게 하기위해서 계율이 있는 것이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못견디게하기 위해서 규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교통법규가 인간을 못살게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좀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 이와같이 원광은 계율에 대하여 좀더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혜숙, 혜공, 대안, 원효로 이어지게 된다. 


  자장은 어떤 사람이냐고 하면 엄격한 계율을 중심으로하는 계율중심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계율불교라고 하는 것은 계율을 지킬 수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선택된 엘리트 중심관이다. 그리고 엘리트 집단의 약점중 하나는 내가 엘리트이다라고하는 자부심 그런데 그 자부심을 자칫 잘못하면 교만으로 이어진다. 자부심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교만으로 연결되어버리면 안된다. 자부심과 교만의 경계선은 대단히 애매하다. 그러나 분명히 자부심이 교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되어야 하는 데 그것이 대단히 힘들다. 하나 자장은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출신도  소판 출신으로 계율을 지킬 수 있으며 지식도 많았다. 외국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 왔으며 그 이후 분황사 주지를 지냈고 황룡사 주지도 지냈다. 황룡사의 주지란 그당시의  신라 정신계를 지배하는 사람을 뜻하며 그는 승단을 형성하여 승기를 바로잡는 작업을  하 게되는 데 거기서 승통이된다. 승통이란 국통의 뜻의로 국통이 되자 명실상부한  자장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원효가 태어난 것은 617년이다. 원효가 24살때 원광이 죽었으므로 원효가 직접 원광에게 수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원광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장이 정확히 몇 살인지는 중국으로 갔다가 돌아온 해는 기록에 남아있다. 자장이 재상을  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제자 10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나이라면 30대후반 내지 40대 초반의 나이라고 보아야 한다.자장이  638년에 중국으로 갔다가 644년에 귀국하게 됨으로 그때가 40이라면 원효보다 20세정도 많은 나이이다. 원광이 죽고 자장의 시대가 왔고 자장이 마음데로 불교계를 흔들고 자장의 사고방식이 신라를 지배하게 된다. 이당시의 신라가 어떠했느냐 하면 백제의 무왕시대로 신라를 계속 침범 신라는 경주에서 부산에 이르는 낙동강 동녁이 겨우 남게된다. 그러면서도 계속 계율불교를 주장하게 되고 진평왕, 진덕여왕, 선덕여왕 때까지 계속 백제에 밀리게 된다.


  김춘추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 당에 부탁을 하여 백제를 압박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한다.


 김춘추는 백제에 대하여 엄청난 원한을 가지게 된다. 원한을 가진다고 한다는 것은 유명한 대하성에서의 전투에서 김풍섭과 딸이 사망한다. 대하성이 무너지면서 자기사위, 딸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죽게되며 그 아픔으로 인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은 깊어진다. 그 후 진덕왕이 죽고 이제 성골은 없고 진골중에서 왕을 뽑게 되는데 김춘추가 왕이 된다. 김춘추가 왕이 되자 태종 무열왕이라 칭하며 김춘추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이행해줄 사람을 찿아 새로운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 정책에 부응했던 것이 무력적으로는 김유신이고 정신적으로는 원효가 등장하게 된다.


 원효가 활동하기 시작한것이 40대 후반 50대 초반이라고 하면 자장은 그당시 70대의 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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