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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이해

한국불교의 빛 - 1.원효와 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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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3-09-26 17:41 조회12,0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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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전래사는 16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교가 신앙체계를 이룩하는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불교 수용과정에서 신앙과 학문적 사상성을 양보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학문적인 연구에 의하여 신앙성이 더욱 체계화 되었으리라 본다.

 그 학문적 체계를 성립시킴에 삼국시대, 고대, 조선, 근대까지 수많은 학승이 노력하고 그 결정체가 한국사상에 빛나고 있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원효와 보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원효는 신라불교의 핵심적 사상을 부각시킨 고승이다. 원효의 학문이 고매하여 그 깨침은 부처님이나 祖師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깨달은 지혜와 실제의 행동이 반드시 일치되지 않음을 지각했기 때문에 다시 聖道의 수행에 나선 것이다.
 그는 小姓居士라 자칭하고 무애박을 두들기면서 무애노래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면서 방방곡곡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다. 그러므로 움막속의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불법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형식이나 틀이 필요없고, 확실하게 툭 터진 一心의 마음을 자재성으로 행동할 따름이었다. 그는 사상도 一心思想으로 귀원시키고 있다.
 우리는 一心의 문제를 다룬 사상을 중도의 핵심을 밝히고 있는「起信論」에서 파악할 수 있다.
 원효는 특히 起信論 계통에 크게 역점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하여 원효가 가까이 저작한 經論들은「金剛三昧經論」「大乘起信論」2卷「大乘起信論別記」「大乘起信論宗要」「大乘起信論料」등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起信論」에서 논파하였다. 그는 과연「一心」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一心은 문자 그대로‘하나의 마음’이다.
 그‘하나’란 무슨 뜻이며‘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원효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듬(染)과 깨끗함(淨)의 법은 성품이 둘이 아니므로 진실(眞)과 허망(妄)의 두 문에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서 모든 법은 실하여 허공과 같으며, 그성품은 스스로 神解함으로 마음이라고 한다.이미 둘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가 있겠는가.하나인 것이 없는데 무엇을 두고 마음이라 하겠는가. 이 도리는 언설을 떠나고 사리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지목할지를 몰라 억지로 한 마음이라 불러본다. (起信論別記本)


 위의 인용문을 통하여‘하나의마음'은 '無所有'며‘道理'며 '離言絶'의 '無二處'로서 ‘諸法이 中實해지는' '性自神解' 그 무엇임이 밝혀졌다.
 그것을 더 부연해 말해보면,‘無所有'란「起信論」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말을 떠난 모습이요, 이름을 떠난 모습이요(離言說相이요, 離名字相이요), 마음의 연을 떠난 모습이요 구경이 평등하며 무·유변이함이 불가한(離心緣相이요, 究竟平等하며 無有變異 不可한)「眞如」한 本性을 일컬음이다.
 또 그것은「無有可歸」「無有可立」모든 것이 그 안에서 모조리 眞하며,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모조리 동일한 것이다. 또 망념이 없는 것이다(離忘念).
 주·객을 분별하는 생각이라면 어떤 생각이든 망념이다. 離忘念이란 그것이 없다는 말이다.
‘無所有'는 하나의 부정적 표현이지만 이를 적극적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道理라고도 볼 수 있다.
 역시「起信論」本文에‘心眞如者는 즉 是一法界, 大總相法門의 體’라고 하였다.
 원효는 왜「法」이라고 하느냐 하면 '軌生眞解'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왜「門」이라고 하느냐 하면‘그것을 통해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것'(通入涅槃)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法門의 體」가 되는 것이 眞如한 마음이라고 하므로 그것은 바로 道이며 理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一心을 해석함에, 一心밖에는 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이 자기의 一心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켜서 육도에 유전하게 됨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一心의 바다를 벗어나지 아니하니, 진실로 一心이 움직여 육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널리 구제하는 서원을 발하게 되는 것이요, 육도가 一心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起信論疏 卷上)
 이 원효의 말에서‘널리 구제하는 서원을 발하고(發弘濟之願) 동체대비를 일으킨다.(起同體大悲)’라고한 이 두사실은 바로 원효의 종교관의 중심사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널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願을 말하고 중생을 동체로 보고 대비심을 발하는 이  두가지 실성이 없고 보면 종교는 성립될 수가 없다.
 언제나 종교철학은 근원적 이론과 실재적인 구원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효는 근원적 이론을 一心에다 두고 一心은 무애자재로 원융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起信論에서 말하는 一心은 대지혜의 광명, 온 세상 만물을 남김없이 비추는 것, 있는 그대로 아는 것, 그 본성이 맑고 깨끗한 것, 스스로 자재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一心의 영역은 광대무변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과 자연, 우주를 하나의 통일장으로 만드는 和諍思想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앞서는 원효의 一心과 자재성을 살펴 보았지만 다음은 보조를 조감하여 보면, 고려 예종 12年 무(1158)년에 황해도 瑞與에서 태어나 熙宗6年(1210)에 입적한 牧牛子 知訥(普祖國師)은 고려조가 나은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꼽을 수 있다. 그에게는 오늘 남아 있는 것으로,「定慧結社文」(1卷) 「修心訣」(1卷)「圓頓成佛論」(1卷)「看話決疑論」(1卷)「眞心直說」(1卷)「法集別行錄入私記」(1卷)「華嚴論節要」(3卷)등의 저술이 있다.
 「그의 敎學觀은 반야의 공사상으로써 立法의 기초를 삼고 起信의 진여사상으로서 골격을 삼았으며 화엄의 性起思想으로서 그 核心을 외웠다.」라고 고 김잉석 박사는 언명한 바 있지만 반야사상은 모든 대승불교의 기본이니 만큼 논외로 하더라도「起信論」과『華嚴經』의 사상은 원효에게 사상적 전기로 간주되어 왔다.
 知訥은 고려불교가 왕실과 너무 밀접하게 관계된 결과 정치적으로는 왕실옹호의 정권 쟁탈전에 개입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부의 축적에 함입하는 등 세속화 되어가는 시대적 상황하에 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불교계를 눈으로 생생히 보아왔고 불교의 병폐를 막고 바른 믿음을 가져 정법을 펴기 위함과 시대적 사명 의식을 자각하고 참다운 불교를 구현하기 위하여 혼연히 일어나 그 시대와 불교를 화쟁하는 지도이념으로 禪敎一如와 頓悟漸修, 定慧雙修等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말한다. 즉 마음을 닦는 사람도 먼저 조사의 도로서 제 마음의 본래 묘함을 알되 문자에 구애되지 말고, 다음에는 논문으로서 마음의 본체의 큰 자비의 공덕이 본문밖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확신하는 여가에 항상 동학을 위해 설명하였다.(華嚴經節要序)
 여기서 말하는「祖道」란 선종의 조사들의 길이란 말이며 「論文」이란 화엄론을 의미한다.
 이 인용구에 언명된 선교일치의 주장과 생활이 知訥에 의해 그 전통이 되살아 났다는 사실은 순수불교를 위하여 새로운 지평을 전개하는 것이다.
 知訥은 또「修心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부처를 찾으려면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먼 곳에서 찾으랴. 여의지 않느니라.
 육신은 거짓이라 나고 멸함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 않고 변하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몸뚱이는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되 한 물건은 신령하여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하시니라. 슬프다. 요즈음 사람들은 어리석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알지 못하여 법을 구함에 멀리 성인에게 미루고 부처를 구함에 마음을 보지 않는구나.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굳이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비록 티끌처럼 많은 겁이 지나도록 몸을 불 태우고 손을 지지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뽑아 경을 쓰며 밤낮으로 눕지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대장경을 줄줄 외우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다만 자기 마음만 알면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부처는 곧 마음'이며‘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않고 변하지도 않는다.'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신령하여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한다. 또‘자기 마음이 참부처' '자기의 성품이 참법'이라고 강조하면서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견집하면 아무리 종교적 고행과 열성과 학습을 시도해도 전혀 무용함을 선언한다.
 그리고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고 했다.
 우리는 이 주장 속에 신라 원효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던 같은 마음(心)관을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원효의 경우만큼 명쾌하고 다각적인 설명은 되어 있지 못한 것이 유감이며 역시 선가다운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것은「敎」의 경시란 현상을 나타내며 그것이 선가에게 있어서는 너무 조급히 전제되어서는 안되었지만 아무튼 원융 화쟁의 태도의 기틀이 여기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진심직설」은 중국에서 선종이 생긴 이래 최초의 조직과 체계를 갖춘 선서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진심의 이명」이란 부분이 있었는데 30종의 이명이 결국 진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진심은 망심에 대한 진심이 아니라 상대적인 진망이심을 초월한 절대적인 무애일심의 진심이다. 그러므로 이 진심에는 진망의 상대개념이 전연 개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망불이라고 한다.
 대도는 그윽히 광활하여 유도 없고 무도 없으며 진심은 그지없이 미묘하여 생각을 돈절하였다. 그러므로 대도의 문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5천의 장교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요, 진심의 핵에 통효한 자는 일언의 의미도 오히려 불필요 할 것이다.
 진심의 발명은 입도의 기점이 될 것이요, 진심의 체중은 오도의 구경의 도리인 것이다.
 우리는 한국사상사에 그 족적을 뚜렷하게 남긴 원효와 보조를 통해서 한국인의 하나됨의 공부가 완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하나됨의 기본은 원효는 一心이고 보조는 眞心이다. 하나와 참다움은 둘이 아니다. 하나의 궁극에 진입하면 그것은 참이 되고 眞如가 된다. 이 진여일심을 구현하려는 철학적 모색이 있어야만 분단의 조국, 사회의 갈등, 모순이 和諍三昧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한국사상에서 가장 속히 재발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고승들의 논리에서 하나됨의 세계에서 평화를 갈구한 역사를 오늘에 밝히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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